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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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읽고 있다고 하면 지인이 말하고 했다. "너무 가볍지 않아?". 신경숙을 읽고 있을 땐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라고 했던가? 하루키와 신경숙을 읽고 있을 때마다 나는 그에게 변명을 해왔던 것 같다. 누구를 위해서인지도 모르면서 최선을 다해. 그가 가진 가벼움에 대한 너무나 가벼운 오해와 감상적이라는 어휘에만 가둬둘 수 없는 절대 고독 같은 것을 최선을 다해 전하고자하다가 결국은 점점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의 하루키와 신경숙이 그렇게 박제되어있는 것을 구제하기는 것은 내 몫이 아니며, 그를 설득하는 번거로움에 열을 내기보다는 나 홀로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더는 방해받고 싶지 않았을 테다. 
 

신경숙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안에서는 최적의 공간을 시뮬레이션 하곤 한다. 너른 평상이 있는 시골집 마당, 자식들 주전부리를 위해 쉴 새 없이 한 솥 가득 무언가 쪄내고 있는 부엌께, 시골집에 다다르는 깊은 밤의 산책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마냥 근원적 공간으로 나를 초대하고 나면 그때서야 활자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냉소와 불신의 시대, 신경숙의 소설은 여전히 '감상적'이며 절대 고독으로 점철된 시린 젊음을 토로한다. 홀로 고독하고 함께 있어도 구원받지 못하는 그 청춘들은 또 어느 시골집에서 위안을 찾고, 상실된 엄마를 그리워할 테지.
 

윤, 단, 명서, 미르. 주인공의 이름에서 벌써부터 나는 죽음을 예견하고, 극복할 수 없는 상실과 좌절을 맛본다. 외자인 이름을 가진 신경숙의 캐릭터들의 비애를 지금도 상처로 기억하는 내게, 이들의 젊음은 비극의 굴레를 짊어진 선고처럼 비춘다. 윤과 단, 미르와 명서는 각각 유년을 함께하고 영혼의 일부를 나눠가진 존재들이다. 윤과 단이 그들만의 시공에 놓여있다면, 미르와 명서 또한 분리 불가능한 소울 메이트라 할 수 있는데, 답해 줄 수 없는 사랑과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들이 뒤섞여드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예측의 문제가 아닌 극한의 감정선을 요하는 문제라 종종 숨이 멎곤 한다.
 

하루키의 전공투와 마찬가지로 우리 세대는 그 시절의 시위를 문학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대학이 폐쇄되고 강의실을 지키는 일이 점차 무력해지는 시절의 최루가스 자욱한 시절의 이야기를 조곤이 들려주는 이들을 대학에서 만난 적이 과연 있었던가? 윤, 명서, 미르가 가졌던 상아탑의 시인, 윤교수의 '크리스토프 론'을 들어본 일이 있기는 했던가? 시위가 필요치 않은 시절을 물려주기 위해 시위했던 이들의 바람처럼 소요가 필요치 않은 시절을 누렸던 적은 있는가? 크리스토프는 어린 예수를 강 저편으로 건너게 하다가 자신이 짊어진 것의 정체를 알게 된다. 세상을 너무 떠안고 있는 존재를 짊어진 자의 어깨를 떠올려본다. 우리는 누구나 크리스트프라고 윤교수가, 신경숙이 말한다. 세상을 짐 지고, 그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다름 아닌 자신이라고, 청춘의 무게에 질식해버릴 것 같은 시간을 가져보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고.
 

군에서 의문사로 죽은 단을 짊어진 윤, 분신해버린 언니의 실종된 연인을 찾아 헤매다 목숨을 놓아버린 미르를 둘러 안고 살아가야하는 명서는 함께 있어 파멸해버릴 불확실한 미래를 피해 닿지 않는 곳에서 머물게 된다. 새벽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어떤 상황이든 간에 그.쪽.에,서 이.쪽.으.로 오갈 수 있었던 그 시절을 가진 이들의 재회가 윤교수의 부음 즈음이라니, 우리는 소중한 누군가를 상실해가는 그 순간에서야 뒤늦은 조우를 하게 되는 모양이다. 나를 짓누르는, 내가 짐 진 것에만 허덕이다가 모든 이들이 세상에 짓 눌린 채였다는 것을 이제야 인정하게 된다.
 

락가수는 스물여덟에 죽고, 구원자는 서른셋에 죽는다. 불멸과 전설이 되기 위해선 요절이라는 과정이 그 끝에 자리잡아야한다. 영원한 젊음,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해 젊음의 정점에서 생의 저편으로 건너가 버린 이들의 전설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남은 자들은 오명을 감수한다. 실상 의미 있는 죽음이란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위로로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척 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끝나버려서 안 되는 젊음을, 아직 이편에 서 있는 우리는 너무도 많이 껴안고 산다. 고통으로 점철된 젊음의 시간이 뒤돌아보면 가장 찬란했다는 진실을 인정하는 것과 사투를 벌이면서. 지지 않는 청춘은 없다, 그리고 완벽한 절망 또한 없다. 
 

신경숙의 소설은 여전히 감상적이다. 이 소설은 감성적인 청춘소설이다. 네 남녀의 엇갈린 행보를 그린 순애보가 아니라, 소소한 이름을 명명하고 습작이며, 명문들을 적곤 했던 비밀의 노트를 가져본 적이 있는 이들을 위한 그런 청춘소설.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이 지금은 바스러져버린 낡은 시집의 한 구절일 수도 있고, 어느 새 절판되어버린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진 추억의 책일 수도 있었던 이들을 위한 그런, 옛 청춘을 위한 초혼가이자 지금에서야 치르게 된 안녕의식을 위한 청춘소설. 안녕이다, 그리고 다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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