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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평점 :
전인미답의 수직빙벽에 매달린 형제에게서 느껴지던 생사의 비감, 금기와 사투하며 생을 지난하게 만들어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지도 장이의 절대 고독, 소녀를 탐한 죄로 오욕을 뒤집어쓸지언정 시와 사랑은 무죄로 선고했던 지독한 애증. 『촐라체』, 『고산자 』, 『은교』, 갈망의 3부작으로 명명된 전작의 광풍 이후로 박범신의 소설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싶었다. 감정의 내핵을 지독스럽게도 파고들어, 불편하고 생경한 감각을 일깨운 후, 생사를 초월한 갈망의 근원에 대해 끝도 없이 고뇌하라는 선고는 그만 듣고 싶었을 런지도 모르겠다.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외면하는 것은 더 힘들다는 것이 박범신의 신작을 마주하기 전에 내린 결론이었다.
『비즈니스』의 ‘ㅁ’시는 서해안 방조제 사업으로 인해 급속하게 팽창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정권의 몇 대를 거쳐 온 새만금사업이 그 모델인 것은 자명한 일이고, 신시가와 구시가가 강남과 강북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모양새까지, 어쩌면 2010년의 묵직한 족적이었던 황석영의 『강남몽』이나 조정래의 『허수아비춤』과 일맥상통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일 수도 있겠다는 짐작은 조금씩 엇갈려가기 시작했다. 강남의 형성사나 재벌 비리에 대한 또 한 편의 소설이겠거니 생각했던 인상이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소설 속의 인물들의 ‘비즈니스’가 자본주의의 가장 저급한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해안의 중국교역의 최전방이 되어 비정상적인 속도로 양적팽창을 이룬 ‘ㅁ’시의 성공신화는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기도 하지만, 성공신화를 조명이 아닌 이면의 삶을 ‘비즈니스’로 포장해서 버텨내야하는 인물군상에 대한 자조가 씁쓸하게 담겨있다. 서해안의 강남으로 우뚝 선 신시가가 급부상할수록 쓰레기와 실패한 삶만이 남게 된 구시가의 비루함은 날로 퇴색되어간다. 신시가의 행태에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당장의 생명줄을 보장받고, 그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정통적인 사회파소설이라기보다는 멜로드라마처럼 섬세하게 표출되고 있기도 한데, 갈망의 3부작과는 달리 ‘비즈니스’를 강요받은 여성의 복잡 미묘한 심리가 극적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회도 넘는 사시실패로 모든 욕구를 거세당하고 노쇠함만 남은 남편과 ㅁ시로 낙향해, 아들을 신시가로 전학시키고 고액과외비를 대기 위해 몸을 파는 비즈니스를 시작한 나는 수직적인 도시의 생존경쟁에서 도태되는 것보다 정결을 버리는 것이 낫다는 신시가적 꿈을 아들에게 쏟아 붓기 시작한다. 그 무렵 출몰하는 신시가의 도시가스관을 타고 부유층만을 터는 ‘타잔’이라는 도둑의 일이 이슈가 되고, 나는 그 도둑과 ‘비즈니스’로 마주치게 된다. 매춘을 비즈니스로 삼은 중년여인과 강도를 비즈니스로 삼은 구시가의 전형적인 실패한 인생인 정준하의 만남은 파멸이 예고되어 있지만, 그네들이 비즈니스에 골몰할수록 가족과 유리되는 현실을 사는 반동으로 한층 더 깊은 유대감을 나누게 된다.
ㅁ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건실한 윤리도, 사회적 책임도 아닌 자본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차근차근 인맥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일탈하지 않는 것이다. 스폰서와 돈 많은 남편으로 자본을 쟁취한 친구 주리가 자신이 스폰서가 되어 젊은 예술가와의 결합을 사랑이라 부르며 자초하는 과정은 자본의 본질을 망각하고 편의적으로 왜곡하려했던 결과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들의 고액과비를 벌기 위해 비즈니스를 해나가는 동안 남편과의 사이는 더욱 정물적으로 변하고, 도둑이면서도 누구보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정준하는 가까이할 수록 애정이 아닌 ‘공범’으로 묶이게 되는 위험천만한 관계를 조성할 뿐이다.
타잔의 정체가 발각되고, 그 여파로 비즈니스의 정체가 폭로되어버린 내가 신시가의 꿈에서 떨려나와 주리의 어머니처럼 돼지기름 냄새를 달고 살게 되는 수순은 자본주의의 행태에 있어서는 물론 이루 말할 수 없는 몰락이라 해야 한다. 그렇지만 남편과 아들과 헤어진 채 , 타잔이 남긴 자폐아와 반지하방에 남은 나는 비로소 인생을 ‘흐뭇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성공을 위해, 신시가적 삶을 위해 자본주의의 질서에 순응하고 부도덕한 비즈니스를 벗지 못했던 과거의 안락함이 아니라, 저잣거리의 누릿한 돼지기름 냄새 속에서 인간성의 회복을 꾀하는 나의 모습은 실패이기도 하지만, 비로소 고약하기 그지없는 비즈니스를 벗게 된 의지의 화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성공의 상징이 도심의 마천루인 것은 분명하다. 그 매끈하고 까마득한 성공한 이들을 위한 랜드마크의 최상층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쓰레기만 남은 실패와 좌절로 가득한 구시가적 삶으로 전락하기 앞서, 이유와 도덕을 불문하고 성공의 행로라고 명명된 순차적인 질서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현실을 산다. ‘정치인의 거짓말’이 ㅁ시의 경우처럼 거대한 신 강남의 구축으로 이어진다면 질타의 목소리는 얼마든지 묵살할 수도 있는 허기진 시절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비즈니스』에서 본다. 부를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도심의 심장부의 스위트룸에 진입한 이들과 인성과 도덕의 마비에서 가까스로 헤어 나온 여인의 모습 중 무엇이 진정한 성공일지, 자본주의의 시대에서 고뇌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박범신의 물음은 언제나 우직하고,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는 순간, 각자의 해답을 위해 진짜 비즈니스를 행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