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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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쿠’를 기억하는가? 노예들과 함께 아프리카 대륙에서 도래한 푸쿠는 악령이자 저주, 파멸의 동의어이며, 신대륙에서 푸쿠의 대사제로 지목할만한 걸출한 인물로 지목된 것은 도미니카의 악명 높은 독재자 트루히요였다고 이야기하던.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도 놀라운 삶』은 푸쿠에 대한 장광설로 시작해 푸쿠 중의 푸쿠인 트루히요가 도미니카인들의 삶에 끼친 절대적인 해악이 얼마나 전 방위적으로 펴져나가는지, 도미니카 이민자 출신의 오스카 일가를 통해 쉽사리 잊지 못할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았던가. 부끄럽게도 트루히요와 도미니카의 역사에 관한 짧디짧은 지식은 주노 디아스가 책에서 싣고 있던 B급스럽고 파괴적인 어조의 원주에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다시 도미니카의 역사 속으로, 트루히요의 통치기를 다룬 또 한 권의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만나면서 『오스카 와오의 짧고도 놀라운 삶』의 원주 속에서 이제 사 발견한 그 흔적을 되새긴다. 

주노 디아스의 원주 속에 언급된 바르가스 요사의 『독재자의 향연』이 『염소의 축제』로 소개되기까지 도미니카를 또 다시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있었다. ‘이 인간은 어떤 역사학자나 저술가도 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을 정도로 궁극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우리의 사우론이자, 아론, 다크사이드였고, 과거에도 앞으로도 영원할 우리의 독재자였으며, 너무나 기이하고, 너무나 변대인 데다 너무나 무시무시해 SF소설 작가가 지어내려도 지어내기 힘든 인물이었다.’는 주노 디아스의 논평은 요사의 소설 속의 트루히요와 동일선상에 높여있으면서도, 요사가 다루는 ‘트루히야토(트루히요 통치기)’에는 트루히요의 추종자 못지않게 자유의지가 마비된 도미니카 인들에 대한 비판도 강하게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트루히요가 어떻게 종말을 맞았는지 알고 있음에도 충격과 경악의 강도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독재자를 처단하지 않는 국민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요사의 펜 끝은 오스카 일가의 경우처럼 하위문화와 키치로 무장하지 않지 않은 채, 시종 진중하고 유려하기 그지없다. 분명 심신을 불편하게 하는 정치적인 관점과 복잡다단한 소설적 시도가 어우러져 미로에 갇힌 것처럼 느껴질 테지만, 독재가 존재하는 시공이 자아내는 집단적 광기와 복종의 악순환을 방조하는 것이 독재 못지않게 추악한 행태임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트루히요의 시대는 종언을 맞이했으나,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요사를 비롯한 라틴문학의 거장들의 지속적인 언급엔 필연적인 구석이 너무도 많다.
  

세계은행에서 일하는 자수성가한 도미니카 중년 독신여성 우라니아는 열네 살 이후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는 도미니카로 귀향한다. 트루히요의 추종자였다 축출된 ‘지식인’ 아버지와의 우라니아 사이의 과거의 상흔이 결코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것이라는 암시와 더불어 독재자의 시점에 음모자들의 고통에 가까운 암살과정을 밀착해 보여줌으로써 소설은 팽팽하게 당겨진 사위처럼 시종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효과를 자아낸다. 우라니아, 트루히요, 트루히요의 추종자와 배신자와 음모자, 그리고 무언의 방조자들이 만들어내는 축제의 장이 의미하는 것이 곧 암살임에 명백함에도, 트루히요의 암살 이후의 정국과 우라니아의 상처가 곧 회복불가능한 도미니카의 황폐함이라는 광막함은 페이지를 덮고 서도 한참을 시달려야하는 후폭풍이었다. 

 ‘염소’는 트루히요의 별명(훈장을 지나치게 달고 다녀 ‘병마개’로 불리기도 했던) 가운데 하나로, 주노 디아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실패한 소도둑’, ‘엘 헤페(대장)’, ‘쌍판’ 등에 이어 트루히요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코드가 된다. 서구에서 악마주의의 표상으로 여기는 염소의 형상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고, 처녀를 유린하는 가공할 정력의 독재자를 일컫기도 하고, 음모자들 사이의 암호명이 되기도 한다. ‘푸쿠’이자 ‘염소’인 트루히요가 도미니카 전역에 그토록 오랫동안, 종국에는 의심도 없이 뿌리 박혀 비대해질 수 있었는지를 이해한다해도 진실이 가진 고약한 무게를 감수하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1930년에서 1961년까지, 트루히요와 그 일가가 폭력과 고문, 대학살과 암살, 강간과 약탈로 도미니카를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공포정치에 굴복한 탓으로 볼 수 없다. 희대의 독재자를 더욱 비대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처자식의 정조를 바치는 것조차 감수하며 굴종한 소위 지식인계급의 맹목적인 충절은 트루히야토의 자양분이 된다. 부하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해 계획된 축출위기를 벗기 위해 몸부림치다 수령에게 열네 살인 딸의 순결을 제물로 바치는 우라니아의 아버지가 ‘지식인’으로 불리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세계은행의 간부가 되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청혼을 줄지어 받는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허울과는 달리, 트루히요의 강간이 유일한 성적경험으로 남은 불모의 여인이 되어 트루히요의 시대를 파헤치면서 상처를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는 우라니아가 곧 도미니카의 과거이자 현재의 상징이다.

 “그런데 네가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최고의 교육을 받은 도미니카 사람들, 지식인들, 미국이나 유럽에서 명문 대학을 졸업한 변호사들이나 의사들 또는 기술자들, 경험이 풍부하고 많은 책을 읽었으며 생각을 지닌 감성적인 교양인들, 그리고 아마도 가장 뛰어난 유머감각과 감정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날 밤 바라오나에서 프로일란 씨가 그랬듯이 어떻게 그토록 야만적으로 학대받는 것을 용인했을까 하는 사실이야.”(p.99) 



독재자를 처단하는 가장 확실하고 극단적인 처방인 암살의 성공이 체제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요사의 진단은 매섭다. ‘하지만 그때가 더 살기 좋았던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고 있었고, 범죄도 더 많지 않았어요.'(p.168)라는 식으로 트루히요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트루히요가 만들 수 있었던 체제, 도미니카 사람들이 조금 빠르거나 늦은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공모자로 참여했던 체제가 얼마나 사악한지’(p.251) 자각할 수 있었던 결코 소수가 아니었던 음모자들의 독재자 처단은 칭송받는 거사로 비추지도 않는다. 염소를 제거하는 피의 축제를 수습하는 행정가며 군부의 인물들이 모두 트루히요의 수족이며, 독재자를 지원했고, 그저 얼굴만을 바꾼 다른 독재자를 여전히 지원하는 것이 미국임이 바뀌는 일 없이 ‘민주적’인 절차를 뒤집어쓴 독재의 새 막이 열리는 것일 뿐. 푸쿠는 결코 죽는 일이 없으며, 새로운 대제사장의 거죽을 빌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아무리 지어내려 해도 그보다 더 무시무시할 수 없는 푸쿠 중의 푸쿠였던 그 남자의 도래를 자진해서 불러들이는 방조죄를 저지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경종으로 다가가야 마땅할 일일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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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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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부재였다. 나는 이 집의 한복판에 있는 여성적인 온기가 아니라 제로이고 영이며, 그것을 향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진공이고, 복도에서 소용돌이치는 싸늘한 바람처럼 숨을 죽인 희끄무레한 혼란이었다. 무시당해 복수심에 불타는.(p.8)


마그다의 죄라면 남아공의 네덜란드계 백인지주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일 테다. 끝내 아들을 낳아주지 못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마그다는 하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부재'이자 '제로'인 채로 자라나 일평생 결핍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비대한 욕망에 시달리는 노처녀가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풍만하고 교활한 새어머니를 데려왔을 때 음습한 어둠 속에서 도끼를 휘두르게 되는데-


그는 집에 새 부인을 데려오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그의 딸이고, 만약 나쁜 말들을 거둬들인다면 착한 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실패에 대해, 평생 실직적인 어둠에 갇혀 있어 구애의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실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나는 그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뛴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움직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다.(p.35)


새 부인을 데려온 적이 없는 아버지와 여전히 유명무실한 존재감의 마그다가 공존하는 시공을 마주하면서, 이 이야기가 온전히 마그다 혼자서 구축해나가는 고립의 역사라는 것이 밝혀진다. 새 부인 대신 아버지가 침대로 끌어들이는 것은 하인 헨드릭의 새 색시 안나이다. 애욕에 찬 날들을 위해 농장의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아버지의 행동의 끝에는 아버지의 흑인 정부를 위해 수발을 드는 처지로 전락해버릴 마그다가 덩그러니 남는다. 도끼 대신 무거운 사냥총을 아버지의 침실 창문으로 쏘아버린 것은 과연 일어난 일인가, 다시 마그다가 창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광기의 역사인 것인가.


우리 중에 누가 짐승일까? 나의 이야기는 이야기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질문을 해야 하는 순간을 연기할 뿐이다. 덤불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내가 으르렁 거리는 소리일까? 공간이 나로부터 확장되어 지구의 네 구석 모두로 퍼져나가는 나라의 심장부에는 나를 막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미친 듯이 날뛰고 무절제한 내가 두려운 걸까?(p.97)


아버지를 부재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나니, 농장에서의 권력구도는 순식간에 전복되어버린다. 체불한 임금대신 마그다의 몸을 강탈하는 헨드릭에게 오히려 친근한 유대감을 애걸하기 시작하는 양상에까지 이르면, 일평생 잊힌 존재였던 여자가 어떻게 또다시 잊히고 철저하게 고립되어 가는지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하인인 채로 마지못해 권력의 우위의 점하게 되다가 주인살해오명이 두려워 헨드릭과 안나가 도주하고나자 마그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공허한 나날들뿐이다. 세상의 가장 외진 곳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자아내는 일 말고는 남은 것이 없는 여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온통 모순에 차고, 자학의 광기로 넘실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내게는 얘기할 수 있는 형제나 아버지, 어머니가 필요하다. 역사와 문화가 필요하다. 희망과 포부가 필요하다. 행복해지기 전에 도덕의식과 목적론이 필요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나는 나 혼자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다시 혼자다. 역사적 현재 속에서 혼자다.(p.229)


존 쿳시의 두 번째 소설인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으려는 순간부터 심신을 옥죄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또 어떤 문장들로 광막함을 자아낼 것인지, 자진해서 개미지옥으로 몸을 던지는 것 마냥 철저하게 몰아붙이는 날 선 문맥은 신경증의 향연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의아할 지경이다. 남아공 식민지배의 역사 속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의 형상을 그네들이 정착해 만든 '아프리칸서스'로 전하는 데 인색했던 목가적 전통의 기존문단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덜' 식민지적인 언어인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해왔던 쿳시가 모국어인 아프리칸서스를 결합해서 탄생시킨 이 소설은 식민지의 온상인 시골농장의 야만적인 본모습을 극렬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결국은 철저하게 자신이 구축한 역사 '나라의 심장부'말고는 가질 수 없던 마그다의 참상을 독백으로 전하면서 세상 어느 곳보다 외지고 고독한 변방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이다.(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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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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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의 고혹적인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는 흡혈귀의 이미지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흑백영화 시절의 헐리우드였습니다. 벨라 루고시를 필두로 한 흡혈귀 전문 배우가 등장해 검은 망토, 십자가, 관, 미녀로 완성되는 공식과도 같은 영화들을 양산해내던 그때에 마치 '전설의 고향'같은 향수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사실 자신을 착취하는 상사를 거대한 공포로 묘사했던 작가의 험난한 인생역정이 숨어있기도 했다니, 공포에 앞서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프란시스 드 코폴라가 멋지고, 예쁜 배우들만 한 가득 불러 모아 만든 동명의 영화는 원작을 순정만화처럼 각색해 토플리스 차림의 여배우들을 등장시켜 쓸데없이 등급만 높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답니다. 드라큘라와 불멸의 사랑을 나누는 미아는 사실, '철의 심장을 가진 여인'으로 묘사된 아주 경건한 여성이었건만, 게리 올드먼과 위노나 라이더의 아름다운 투샷으로 육체미가 넘치는 소녀감성의 영화를 용서해버리고 말았던 과거가 떠오르는군요.
 

'트와일라잇 사가'가 이상기류를 형성하기 전부터 흡혈귀, 즉 뱀파이어를 다룬 무수히 많은 원작과 영화화가 있어왔습니다. 차도남, 아니 차흡남이랄까, 차가운 흡혈 남자와 그 남자의 발치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미녀가 등장하는 구식의 패턴이 지나고, 앤 라이스가 만들어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필두로 한 뱀파이어 연대기는 뱀파이어의 원류를 '레스타'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철학적인 구석이 있던 시리즈였습니다. 1편을 제외하곤 흥행도, 비평도 외면 받은 탓에 여전히 시리즈의 전권이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잊혀져가는 패턴이 또 하나. 뱀파이어 장르라기보다는 헤모글로빈이 난무하는 블록버스터로 버무려진 뱀파이어 사냥꾼이 등장하는 시리즈가 반짝였던 것도 패턴으로 볼 수 있을지도요.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사실 브램 스토커를 원류도 삼는 것이 아니라 리젠시 시대의 살롱극을 모태로 삼아 유유히 흘러왔던 로맨스 소설의 결정체 같다는 인상이 짙어요. 에드워드와 벨라의 로맨스에 불멸성을 더해주는 양념으로 등장하는 뱀파이어 대 늑대인간의 혈투를 신 패턴으로 치고 나니-
 
 


 


대체 이 문제적 소설, 영화 『렛미인』은 어느 범주에 넣어야한다는 말입니까? 정통 흡혈귀문학(?)과는 참 멀리도 왔다는 것을 단언합니다. 불멸에 관한 철학적인 탐구도 아니며, 무차별적인 살육전이 벌어지는 학살극도 물론 아니고, 사랑의 완성에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역할을 하는 뱀파이어 코스프레 로맨스도 아닌 것이, 이다지도 서글픈 여운으로 독자를, 관객을 사로잡고 난리란 말입니까? 뱀파이어 장르를 표방한 지독스런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는 이 괴기스럽기 짝이 없는 원작소설은 동화마저도 을씨년스러운 북구의 스타일처럼 잔혹동화의 현대적인 재해석이라고 보여 집니다. 소년과 소녀, 아니 왕따 소년과 성 정체성을 잃은 시간에 갇힌 어린 뱀파이어의 결국은 서로를 찾은 이야기. 마치 절망적으로 카이를 찾아, 눈의 여왕을 좆는 겔다처럼, 마침내 서로를 찾은 소년소녀의 잔혹한 여정처럼 성장이란 결국은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혹독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닐까 싶습니다.
 

그 소년 오스카르는 요실금에 걸려있는 뚱뚱한 왕따 소년입니다. 그는 패배의식에 가득 차있고, 그 울분을 토로할 길이 없어 살인사건을 스크랩하거나 주머니칼로 나무를 위협하며 나름대로의 피의 의식을 거행하며 하루를 버텨나갑니다. 이웃의 소녀 엘리는 예쁘장한 외모와는 달리 악취를 풍기며 한겨울에도 니트 한 장에 맨발로 놀이터를 누비는 야릇한 아이지요. 그 애가 사실 까마득한 시간동안 열두 살 언저리를 살아온 뱀파이어라는 건 이 잔혹극의 무시무시한 요소가 아닙니다. 오스카르의 구원할 길 없는 극한의 고통, 피를 얻기 위해 소아성애자에게 몸을 담보한 채 근근이 살아가야하는 엘리의 곤궁함 이상으로 이들이 살고 있는 도시, 블라케베리의 주민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추레한 인생의 패배자들입니다. 오스카르를 괴롭히는 무리들은 그렇게 폭력과 절도에 익숙해지다 마약과 더 강도 높은 거리의 범죄자들로 거듭날 것이고, 노상 선술집에 앉아 공짜 술을 바라는 중년의 무리들 앞에는 아직도 한참은 내리막길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거꾸로 매달린 채 피가 뽑혀나간 살인사건들은 블라케베리의 불안과 패색을 형상화한 유령처럼 도시괴담의 한 축으로 자리합니다.
 

절대적인 미모와 불멸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뱀파이어의 카리스마는 엘리에게선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연약하고 중성적인 외양은 엘리가 생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줄 뿐으로 오스카르가 엘리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어주지는 않습니다. 들어오라는 승낙의 말이 없으면 쉽게 침입할 수도 없는 경계 밖의 엘리와 가족이며 학교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입고 내몰리는 오스카르는 많이도 닮았습니다. 잔혹하게 피를 약탈하는 포식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정심을 자극하고 '초대'를 받아야만 비천한 생을 이어갈 수 있는 엘리가 오스카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린치의 현장에서 구하는 장면은 성장이 곧 유년의 안녕의식이라는 것을 폭발적으로 보여줍니다. 홀로 고독하던 두 외통수가 둘만의 절대고독 속으로 향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과 단절되어야하는 통과의례가 시리게도 펼쳐지는 탓에 그들의 유대감이 가진 무게는 삶과 죽음을 모두 초월해 비로소 찬연해지기 시작합니다.
 

엘리보다 더 고운 미소년 오스카르가 등장했던 스웨덴 버전의 영화와 엘리를 아예 소녀로 등장시켜 매끈하면서도 맥 빠지는 구석이 없진 않았던 헐리우드 리메이크 작들은 원작의 거칠고 파괴적인 힘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렛미인』이 과연 해피엔딩인가에 관한 항간의 논쟁도 죽음과 뒤엉킨 삶이 그렇듯,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혼탁한 세상사 속에서 누구도 단언할 수 없어 어느 방향으로든 묶어둘 수 없어 더욱 강렬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오스카르는 과연 엘리의 새로운 혈액공급책이 되어버리는 것일지, 엘리는 어린 아이 특유의 유약함으로 스스로는 끊어버릴 수 없는 저주의 불멸을 오스카르와 공유하게 될 것인지 써 지지 않아서, 그려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불안과 공포와 고통뿐이었던 블라케베리를 떠나는 소년의 트렁크 속에 들어있는 유일무이한 어느 존재가 눈부신 이유는 그것 말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외통수와 외통수가 절체절명의 고독 속에서 서로를 찾아낸 그 기적 같은 확률에 미소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그리 복잡할 것 없는 진리일 뿐. 온통 조악하고 거칠고 엇나간 것들로만 엮어진 북구에서 온 잔혹동화는 거듭해서 읽고, 스크린으로 새롭게 만날수록 명민함을 더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들의 탈출이자 구원인 새로운 여정 앞에서 이토록 안도할 수 있게 하다니, 오스카르의 트렁크가 당도하는 그곳엔 적어도 위선과 위악도 존재치 않는 희석된 고독이 자리할 것임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자기 안에 초대하고 싶은 이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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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 대장경 / 조정래 / 해냄 

 팔만대장경을 지키려는 민초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비애를 담은 <대장경>의 개정판이 나왔다. <허수아비춤>으로 건재함을 드러냈던 우리 시대의 거장의 귀한 족적을 다시금 만나고 싶다. 

 

 

 

 

 2. 허기의 간주곡 / 르 클레지오 / 문학동네  

 르 클레지오를 처음 접한 고교시절, 그의 글은 너무나 몽환적이고 연무에 가득차있는 모호함의 절정이라는 인상이 지배적이라 그 후의 만남들도 그닥 신통치 않았던 적이 있었다.  

세련된 완역의 수가 늘어갈수록 과거의 인상은 다른 양상으로 다가와 늘 신작을 기다리게 만드는 설렘을 주었고, 그가 작년 서울체류 당시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허기의 간주곡>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류 속의 여인의 삶을 다룬 진중한 울림으로 다가올 듯하다.

 

 

 3. 바보들의 결탁 / 존 케네디 툴 / 도마뱀출판사  

작가에 대한 소개며, 소설에 대한 언급 자체가 생소했기에 눈길이 갔다. 기사담을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착란을 일으킨 돈 키호테를 방불케하는 주인공의 기이한 행적이 블랙코미디의 정수를 자아내고 있는 것 같은데, 적재적소에 비웃음을 날리는 촌철살인의 풍자극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 포스가 풍긴다.

 

 

 

 4. 고독한 시월의 밤 / 로저 젤라즈니 / 시공사  

로저 젤라즈니를 수식하는 화려한 문구들만큼이나 나를 주늑들게 만드는 그의 휘황한 필력이란! 

작가의 마지막 소설인 이 작품은 온갖 장르의 하이브리드라는 인상과 더불어 결코 만만치 않은 독서경험을 보장하는 두뇌게임과 더불어 깊이 있는 성찰까지 제공하지 않을까 한다. 

 

 

 

 5. 주석 달린 허클베리 핀 / 마크 트웨인 / 현대문학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 종결자'라는 신조어를 가져다, '주석 달린 시리즈의 종결자'정도로 표현해도 무방할지 직접 대면해보고 싶달까.  주석판은 소장과 탐독의 두 가지 측면을 만족시켜야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것 같은데, 오탈자가 난무하고, 감수가 덜 되어 개정이 필요한 주석들로 인해 눈쌀이 찌푸려지는 경험을 제법 한 터라, '허크'를 얼마나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 기대가 된다. 주석판의 종결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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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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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의 일이긴 하지만 문예잡지의 연재소설이나 신문소설을 열심히 따라 읽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전자는 아빠의 취향에 따른 혜택이었고, 후자는 『새의 선물』의 작가가 당시 구독했던 신문에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연재했었기 때문이다. 꽤나 어렸던 내가 언니의 책장에서 『새의 선물』을 읽고 받았던 충격이란. 지금 생각해도 파격적이고 적나라한 묘사가 가득했던 그의 소설을 신문지상에서 날마다 엿보는 것은 매우 자극적인 일이었기에, 후에 단행본으로 만났을 때의 감흥은 오히려 그 시절만큼의 동요를 부르진 않았다. 내가 끝까지 완독한 신문연재소설은 은희경의 작품이 유일했고, 그의 소설집과 여러 대표작들에 받았던 인상은 여전히 파격과 원숙의 경계를 넘나들었기에 어찌 보면 은희경에 대한 유년의 기억은 쉽사리 변형되지 않곤 했다.


신문연재 같은 예스럽고 정통적인 연재방식이 온라인으로 옮겨 온지도 어언, 은희경의 신작 또한 네이버의 문학동네 카페에서 일일 연재 되었던 것은 시대적 변화의 소산이겠지만, 신문소설을 열심히 따라 읽었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면 격세지감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 흐릿하고 구김이 많은 신문 지면보다 온라인 일일연재를 따라 읽는 것이 여전히 서툰 나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을 들을지라도 종이책에 대한 격심한 애정 탓으로 치부하며, 클릭의 순간을 억누르게 위해 사투를 벌이며 단행본으로 묶이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을 기다린 셈이다. 『소년을 위로해줘』와 만나기까지.


열일곱의 연우가 자신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관조적이기까지 하다. 연우의 소년기를 수식하는 단어에는 반항이나 방랑 같은 고전적인 클리셰 대신 고요한 자기혁명의 힙합 래핑이 깃들어있다. 이토록 차분히 자신의 소년기를 반추할 수 있는 열일곱이 세상에 존재할까하는 의문은, 소설 전체에 흐르는 키비를 비롯한 힙합 뮤지션들의 읇조림으로 대변되는 서정적인 자기언어와 교차되면서 세상의 모든 소년들의 개별성을 혁명하기에 이른다. 남자다움을 강요받고, 평범함의 틀을 벗어나는 순간 마주쳐야하는 극단적인 경계의 시선들과의 끊임없는 사투가 방대한 페이지 내내 계속되는 것은 결코 편치만은 않다. 소년을 이야기하는 은희경의 화법은 힙합의 라임 안에서도 순종하는 법이 없으니.


옷 칼럼니스트인 엄마와 단둘이 사는 연우는 이사 온 첫 날, 자신의 방을 올려다보는 소녀에게 눈을 빼앗기는데 그 방의 전 주인이었던 소녀의 선배는 두 사람의 관계에 큰 변수가 된다. 법정까지 가야했던 사고로 귀국한 독고태수와 친구가 된 연우는, 그 소녀 채영과 친밀한 사이로 발전한다. 태수가 권해준 고등학생 힙합 뮤지션 'G-그리핀'의 노래들은 연우가 표출하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확고한 자기의식을 대변해주는 창구가 되고, 그의 언어들은 채영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면의 교감이 되어준다. 첫 눈을 함께 보는 사이로 발전한 연우와 채영의 사이에, 'G-그리핀'의 정체가 이사간 전 주인이자, 채영의 선배였던 민기훈으로 밝혀진 후 연우는 채영과의 사이에서 단절감을 떨칠 수가 없게 된다.


남자답지 못하고 눈 밖에 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연우, 지진아라고 치부되었던 과거를 가진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채영, 사건사고를 부르는 자력을 가지고 있는 위태로운 태수로 대변되는 공식적인 나이의 소년들과 더불어, 여전히 소년을 벗지 못한 어른들에 대한 조명이 비등하게 진행되는 것을 느낀다. 친절과 배려로 자신을 무장하지만 무거운 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늘 도망치는 연우의 엄마 신민아 씨, 힙합 칼럼을 연재하는 엄마의 연하 애인 재욱 형, 권위적이고 독선적이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그 옷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채영의 아버지, 태수와 마리 남매의 모든 것을 컨트롤하려고 하지만 행복하지 못한 태수의 엄마 등. 한때 소년이었던 이들이 각기 미완의 성장으로 불완전한 삶을 틀에 맞추어, 또는 틀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모습은 소년들의 자기혁명에 때로는 상처, 격려, 연민이 되어 나타난다.


"내가 남하고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그거 몹시 힘든 일이야. 모든 게 다 자기 책임이 되거든. 안전한 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여야 하고, 정해진 가치에 따르지 않으려면 하나하나 자기가 만들어가야 해. 또 무리에서 떨어져나가면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설명해야 해. 경쟁을 피하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남과 다른 방식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일이라면 말야. 어쨌거나 나는 네 선택이 마음에 들어. 우리, 재미없는데도 꾹 참으면서 남들한테 맞춰 살지는 말자. 혼자면 재미없다는 것, 그것도 다 사람을 몇 무더기로 묶은 다음 이름표ㅕ를 붙이고 마음대로 끌고 다니려는, 잘못된 세상이 만들어낸 헛소문 같은 거야. 혼자라는 게 싫으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되지만 혼자라는 자체가 문제는 아니거든." (p.171)


신민아씨, 엄마의 인생론은 연우의 미숙함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닥쳐오는 현실의 벽을 그려내 주기도 하지만, '소년'을 상실하지 않는 대가는 비우호적인 시선들에 자신을 고스란히 노출시켜야하는 고독을 가져오기도 한다. 화목하게 지내야만 좋은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행복이 가정을 결속시키기도 한다는 이야기 또한 연우와 채영과 태수네 사정을 짐작가능하게 하지만, 소년과 소년이었던 이들의 간극은 화합보다는 참사를 부르는 몰이해로 치닫기가 쉽다. 소년을, 한때 소년이었던 이들을 위한 위로가 이다지도 절실한 이유는, 소년다움과의 이별을 자의든 타의든 간에 강요받는 시절을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리핀의 날개를 달고,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지닌 상대를 찾아야하는 지상의 과제를 망각하기 일쑤인 미숙한 소년들을 위한 친절하지는 않지만, 결코 눈을 속이는 일은 없는 안내서를 만난 격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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