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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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의 고혹적인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는 흡혈귀의 이미지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흑백영화 시절의 헐리우드였습니다. 벨라 루고시를 필두로 한 흡혈귀 전문 배우가 등장해 검은 망토, 십자가, 관, 미녀로 완성되는 공식과도 같은 영화들을 양산해내던 그때에 마치 '전설의 고향'같은 향수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사실 자신을 착취하는 상사를 거대한 공포로 묘사했던 작가의 험난한 인생역정이 숨어있기도 했다니, 공포에 앞서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프란시스 드 코폴라가 멋지고, 예쁜 배우들만 한 가득 불러 모아 만든 동명의 영화는 원작을 순정만화처럼 각색해 토플리스 차림의 여배우들을 등장시켜 쓸데없이 등급만 높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답니다. 드라큘라와 불멸의 사랑을 나누는 미아는 사실, '철의 심장을 가진 여인'으로 묘사된 아주 경건한 여성이었건만, 게리 올드먼과 위노나 라이더의 아름다운 투샷으로 육체미가 넘치는 소녀감성의 영화를 용서해버리고 말았던 과거가 떠오르는군요.
 

'트와일라잇 사가'가 이상기류를 형성하기 전부터 흡혈귀, 즉 뱀파이어를 다룬 무수히 많은 원작과 영화화가 있어왔습니다. 차도남, 아니 차흡남이랄까, 차가운 흡혈 남자와 그 남자의 발치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미녀가 등장하는 구식의 패턴이 지나고, 앤 라이스가 만들어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필두로 한 뱀파이어 연대기는 뱀파이어의 원류를 '레스타'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철학적인 구석이 있던 시리즈였습니다. 1편을 제외하곤 흥행도, 비평도 외면 받은 탓에 여전히 시리즈의 전권이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잊혀져가는 패턴이 또 하나. 뱀파이어 장르라기보다는 헤모글로빈이 난무하는 블록버스터로 버무려진 뱀파이어 사냥꾼이 등장하는 시리즈가 반짝였던 것도 패턴으로 볼 수 있을지도요.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사실 브램 스토커를 원류도 삼는 것이 아니라 리젠시 시대의 살롱극을 모태로 삼아 유유히 흘러왔던 로맨스 소설의 결정체 같다는 인상이 짙어요. 에드워드와 벨라의 로맨스에 불멸성을 더해주는 양념으로 등장하는 뱀파이어 대 늑대인간의 혈투를 신 패턴으로 치고 나니-
 
 


 


대체 이 문제적 소설, 영화 『렛미인』은 어느 범주에 넣어야한다는 말입니까? 정통 흡혈귀문학(?)과는 참 멀리도 왔다는 것을 단언합니다. 불멸에 관한 철학적인 탐구도 아니며, 무차별적인 살육전이 벌어지는 학살극도 물론 아니고, 사랑의 완성에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역할을 하는 뱀파이어 코스프레 로맨스도 아닌 것이, 이다지도 서글픈 여운으로 독자를, 관객을 사로잡고 난리란 말입니까? 뱀파이어 장르를 표방한 지독스런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는 이 괴기스럽기 짝이 없는 원작소설은 동화마저도 을씨년스러운 북구의 스타일처럼 잔혹동화의 현대적인 재해석이라고 보여 집니다. 소년과 소녀, 아니 왕따 소년과 성 정체성을 잃은 시간에 갇힌 어린 뱀파이어의 결국은 서로를 찾은 이야기. 마치 절망적으로 카이를 찾아, 눈의 여왕을 좆는 겔다처럼, 마침내 서로를 찾은 소년소녀의 잔혹한 여정처럼 성장이란 결국은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혹독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닐까 싶습니다.
 

그 소년 오스카르는 요실금에 걸려있는 뚱뚱한 왕따 소년입니다. 그는 패배의식에 가득 차있고, 그 울분을 토로할 길이 없어 살인사건을 스크랩하거나 주머니칼로 나무를 위협하며 나름대로의 피의 의식을 거행하며 하루를 버텨나갑니다. 이웃의 소녀 엘리는 예쁘장한 외모와는 달리 악취를 풍기며 한겨울에도 니트 한 장에 맨발로 놀이터를 누비는 야릇한 아이지요. 그 애가 사실 까마득한 시간동안 열두 살 언저리를 살아온 뱀파이어라는 건 이 잔혹극의 무시무시한 요소가 아닙니다. 오스카르의 구원할 길 없는 극한의 고통, 피를 얻기 위해 소아성애자에게 몸을 담보한 채 근근이 살아가야하는 엘리의 곤궁함 이상으로 이들이 살고 있는 도시, 블라케베리의 주민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추레한 인생의 패배자들입니다. 오스카르를 괴롭히는 무리들은 그렇게 폭력과 절도에 익숙해지다 마약과 더 강도 높은 거리의 범죄자들로 거듭날 것이고, 노상 선술집에 앉아 공짜 술을 바라는 중년의 무리들 앞에는 아직도 한참은 내리막길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거꾸로 매달린 채 피가 뽑혀나간 살인사건들은 블라케베리의 불안과 패색을 형상화한 유령처럼 도시괴담의 한 축으로 자리합니다.
 

절대적인 미모와 불멸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뱀파이어의 카리스마는 엘리에게선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연약하고 중성적인 외양은 엘리가 생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줄 뿐으로 오스카르가 엘리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어주지는 않습니다. 들어오라는 승낙의 말이 없으면 쉽게 침입할 수도 없는 경계 밖의 엘리와 가족이며 학교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입고 내몰리는 오스카르는 많이도 닮았습니다. 잔혹하게 피를 약탈하는 포식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정심을 자극하고 '초대'를 받아야만 비천한 생을 이어갈 수 있는 엘리가 오스카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린치의 현장에서 구하는 장면은 성장이 곧 유년의 안녕의식이라는 것을 폭발적으로 보여줍니다. 홀로 고독하던 두 외통수가 둘만의 절대고독 속으로 향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과 단절되어야하는 통과의례가 시리게도 펼쳐지는 탓에 그들의 유대감이 가진 무게는 삶과 죽음을 모두 초월해 비로소 찬연해지기 시작합니다.
 

엘리보다 더 고운 미소년 오스카르가 등장했던 스웨덴 버전의 영화와 엘리를 아예 소녀로 등장시켜 매끈하면서도 맥 빠지는 구석이 없진 않았던 헐리우드 리메이크 작들은 원작의 거칠고 파괴적인 힘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렛미인』이 과연 해피엔딩인가에 관한 항간의 논쟁도 죽음과 뒤엉킨 삶이 그렇듯,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혼탁한 세상사 속에서 누구도 단언할 수 없어 어느 방향으로든 묶어둘 수 없어 더욱 강렬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오스카르는 과연 엘리의 새로운 혈액공급책이 되어버리는 것일지, 엘리는 어린 아이 특유의 유약함으로 스스로는 끊어버릴 수 없는 저주의 불멸을 오스카르와 공유하게 될 것인지 써 지지 않아서, 그려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불안과 공포와 고통뿐이었던 블라케베리를 떠나는 소년의 트렁크 속에 들어있는 유일무이한 어느 존재가 눈부신 이유는 그것 말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외통수와 외통수가 절체절명의 고독 속에서 서로를 찾아낸 그 기적 같은 확률에 미소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그리 복잡할 것 없는 진리일 뿐. 온통 조악하고 거칠고 엇나간 것들로만 엮어진 북구에서 온 잔혹동화는 거듭해서 읽고, 스크린으로 새롭게 만날수록 명민함을 더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들의 탈출이자 구원인 새로운 여정 앞에서 이토록 안도할 수 있게 하다니, 오스카르의 트렁크가 당도하는 그곳엔 적어도 위선과 위악도 존재치 않는 희석된 고독이 자리할 것임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자기 안에 초대하고 싶은 이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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