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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푸쿠’를 기억하는가? 노예들과 함께 아프리카 대륙에서 도래한 푸쿠는 악령이자 저주, 파멸의 동의어이며, 신대륙에서 푸쿠의 대사제로 지목할만한 걸출한 인물로 지목된 것은 도미니카의 악명 높은 독재자 트루히요였다고 이야기하던.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도 놀라운 삶』은 푸쿠에 대한 장광설로 시작해 푸쿠 중의 푸쿠인 트루히요가 도미니카인들의 삶에 끼친 절대적인 해악이 얼마나 전 방위적으로 펴져나가는지, 도미니카 이민자 출신의 오스카 일가를 통해 쉽사리 잊지 못할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았던가. 부끄럽게도 트루히요와 도미니카의 역사에 관한 짧디짧은 지식은 주노 디아스가 책에서 싣고 있던 B급스럽고 파괴적인 어조의 원주에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다시 도미니카의 역사 속으로, 트루히요의 통치기를 다룬 또 한 권의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만나면서 『오스카 와오의 짧고도 놀라운 삶』의 원주 속에서 이제 사 발견한 그 흔적을 되새긴다.
주노 디아스의 원주 속에 언급된 바르가스 요사의 『독재자의 향연』이 『염소의 축제』로 소개되기까지 도미니카를 또 다시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있었다. ‘이 인간은 어떤 역사학자나 저술가도 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을 정도로 궁극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우리의 사우론이자, 아론, 다크사이드였고, 과거에도 앞으로도 영원할 우리의 독재자였으며, 너무나 기이하고, 너무나 변대인 데다 너무나 무시무시해 SF소설 작가가 지어내려도 지어내기 힘든 인물이었다.’는 주노 디아스의 논평은 요사의 소설 속의 트루히요와 동일선상에 높여있으면서도, 요사가 다루는 ‘트루히야토(트루히요 통치기)’에는 트루히요의 추종자 못지않게 자유의지가 마비된 도미니카 인들에 대한 비판도 강하게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트루히요가 어떻게 종말을 맞았는지 알고 있음에도 충격과 경악의 강도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독재자를 처단하지 않는 국민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요사의 펜 끝은 오스카 일가의 경우처럼 하위문화와 키치로 무장하지 않지 않은 채, 시종 진중하고 유려하기 그지없다. 분명 심신을 불편하게 하는 정치적인 관점과 복잡다단한 소설적 시도가 어우러져 미로에 갇힌 것처럼 느껴질 테지만, 독재가 존재하는 시공이 자아내는 집단적 광기와 복종의 악순환을 방조하는 것이 독재 못지않게 추악한 행태임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트루히요의 시대는 종언을 맞이했으나,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요사를 비롯한 라틴문학의 거장들의 지속적인 언급엔 필연적인 구석이 너무도 많다.
세계은행에서 일하는 자수성가한 도미니카 중년 독신여성 우라니아는 열네 살 이후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는 도미니카로 귀향한다. 트루히요의 추종자였다 축출된 ‘지식인’ 아버지와의 우라니아 사이의 과거의 상흔이 결코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것이라는 암시와 더불어 독재자의 시점에 음모자들의 고통에 가까운 암살과정을 밀착해 보여줌으로써 소설은 팽팽하게 당겨진 사위처럼 시종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효과를 자아낸다. 우라니아, 트루히요, 트루히요의 추종자와 배신자와 음모자, 그리고 무언의 방조자들이 만들어내는 축제의 장이 의미하는 것이 곧 암살임에 명백함에도, 트루히요의 암살 이후의 정국과 우라니아의 상처가 곧 회복불가능한 도미니카의 황폐함이라는 광막함은 페이지를 덮고 서도 한참을 시달려야하는 후폭풍이었다.
‘염소’는 트루히요의 별명(훈장을 지나치게 달고 다녀 ‘병마개’로 불리기도 했던) 가운데 하나로, 주노 디아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실패한 소도둑’, ‘엘 헤페(대장)’, ‘쌍판’ 등에 이어 트루히요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코드가 된다. 서구에서 악마주의의 표상으로 여기는 염소의 형상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고, 처녀를 유린하는 가공할 정력의 독재자를 일컫기도 하고, 음모자들 사이의 암호명이 되기도 한다. ‘푸쿠’이자 ‘염소’인 트루히요가 도미니카 전역에 그토록 오랫동안, 종국에는 의심도 없이 뿌리 박혀 비대해질 수 있었는지를 이해한다해도 진실이 가진 고약한 무게를 감수하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1930년에서 1961년까지, 트루히요와 그 일가가 폭력과 고문, 대학살과 암살, 강간과 약탈로 도미니카를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공포정치에 굴복한 탓으로 볼 수 없다. 희대의 독재자를 더욱 비대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처자식의 정조를 바치는 것조차 감수하며 굴종한 소위 지식인계급의 맹목적인 충절은 트루히야토의 자양분이 된다. 부하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해 계획된 축출위기를 벗기 위해 몸부림치다 수령에게 열네 살인 딸의 순결을 제물로 바치는 우라니아의 아버지가 ‘지식인’으로 불리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세계은행의 간부가 되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청혼을 줄지어 받는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허울과는 달리, 트루히요의 강간이 유일한 성적경험으로 남은 불모의 여인이 되어 트루히요의 시대를 파헤치면서 상처를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는 우라니아가 곧 도미니카의 과거이자 현재의 상징이다.
“그런데 네가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최고의 교육을 받은 도미니카 사람들, 지식인들, 미국이나 유럽에서 명문 대학을 졸업한 변호사들이나 의사들 또는 기술자들, 경험이 풍부하고 많은 책을 읽었으며 생각을 지닌 감성적인 교양인들, 그리고 아마도 가장 뛰어난 유머감각과 감정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날 밤 바라오나에서 프로일란 씨가 그랬듯이 어떻게 그토록 야만적으로 학대받는 것을 용인했을까 하는 사실이야.”(p.99)
독재자를 처단하는 가장 확실하고 극단적인 처방인 암살의 성공이 체제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요사의 진단은 매섭다. ‘하지만 그때가 더 살기 좋았던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고 있었고, 범죄도 더 많지 않았어요.'(p.168)라는 식으로 트루히요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트루히요가 만들 수 있었던 체제, 도미니카 사람들이 조금 빠르거나 늦은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공모자로 참여했던 체제가 얼마나 사악한지’(p.251) 자각할 수 있었던 결코 소수가 아니었던 음모자들의 독재자 처단은 칭송받는 거사로 비추지도 않는다. 염소를 제거하는 피의 축제를 수습하는 행정가며 군부의 인물들이 모두 트루히요의 수족이며, 독재자를 지원했고, 그저 얼굴만을 바꾼 다른 독재자를 여전히 지원하는 것이 미국임이 바뀌는 일 없이 ‘민주적’인 절차를 뒤집어쓴 독재의 새 막이 열리는 것일 뿐. 푸쿠는 결코 죽는 일이 없으며, 새로운 대제사장의 거죽을 빌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아무리 지어내려 해도 그보다 더 무시무시할 수 없는 푸쿠 중의 푸쿠였던 그 남자의 도래를 자진해서 불러들이는 방조죄를 저지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경종으로 다가가야 마땅할 일일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