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 - 제41회 일본 문예상 수상작
야마자키 나오코라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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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소설의 타이틀을 검색했더니 성인인증이 떠서 황당했다.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를 설명하는 필수적인 수식어는 '타이틀과는 다르게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다'라는 것이 아닐까? 식상하지만 나도 그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의도하고 방임한대로, 제멋대로 짐작한 독자들에게 다소의 배신감(?)과 더불어, 씁쓰레한 사랑의 잔상을 가득 안은 채.

     39세의 미술 전문학교 강사인 유부녀 유리와 사랑에 빠진 19세의 풋내 나는 학생 미루메. 이 흔해빠진 불륜의 코드를 에쿠니 가오리였다면, 섬세한 문체로 아련하게 그려냈을 것이고, 무라카미 류였다면 사회문제로까지 변질되는 치정극으로, 와타나베 준이치라면 처절하기까지 한 신쥬(동반자살)로 풀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야마자키 나오코라는 사랑과 실연의 과정을 담백하고 담백하게 그려가고 있다. 김빠진 맥주마냥.

     유리는 시원찮은 그림을 그리고, 늙수그레한 남편과는 썩 사이가 좋지 못하고, 예쁘기 보다는 딱 그 나이 때의 다소 느슨한 몸매를 가진 중년여성이다. 일상적인 일에는 마냥 서툴기만 해, 가끔은 신경질이 날만큼 손이 많이 간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돌봐주고 싶은 욕구 때문에 불안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자꾸만 안고 싶고, 그저 그런 섹스를 해도 좋기만 하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미루메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랑을 해 보면 이상형이라는 게 따로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모습에 마음이 빨려들고 만다. 그런 것이다. 내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 있는 그 사람의 모습에 내 마음이 빨려들고 마는 것이다.(p 47) 

 

     도덕성이나 상식적인 잣대로는 도무지 가늠하기 힘든 유리와의 사랑이 일방적으로 끝나버려도, 미루메는 도무지 유리를 놓을 수가 없다. 실연을 당해도, 여전히 유리를 그리워하는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이 청년에게서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가 떠오른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를 외치던 상우. 그러나 사랑이 변하던, 변하지 않던, 끝이라고 해서 사랑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미루메의 항변에, 정말로 타인의 사랑을 비웃을 수가 없다. 

     지난 해 일본에서 개봉하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던 바 있던 동명의 영화는, 정말 40대에 가까운 나가사쿠 히로미(1970년생)가 유리로 열연하는데, 원작과는 다르게 너무나 귀엽고 깜찍한 매력이 철철 넘쳐, 마치 트루먼 카포티의 헤로인을 보는 것 같았다. 마루야마 켄이치(미루메), 아오이 유우(엔짱)등이 나오는 호화 캐스팅이었지만, 원작 특유의 사랑의 서늘한 온도차를 미묘하게 살리지는 못했다. 130분이 넘는 버거운 러닝타임 내내, 여기저기 무게중심이 너무나 많이 삽입되어 있어, 산만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1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중편이지만, 강렬한 타이틀과 대비를 이루며 시종 차분하게만 전개되는 쌉쌀한 사랑이야기는 인상적이다. 사랑이 변해가고 끝나버린 이후일지라도, 또 다시 찾아들 다른 사랑에게서는 발견해낼 수 없었던 어느 정수를 간직한 채,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 흐름 속에 몸을 맡기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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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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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발적으로 발생한 불운이 소중한 것들을 송두리째 전복하고, 인생의 향로를 바꾼다. 브리오니는 언니의 정사를 목격함으로서(『속죄』), 헨리 퍼론은 사소한 접촉사고에서(『토요일』), 클라이브 린리에게는 등산길에서 목격한 폭행사건(『암스테르담』)이 그렇다. 우연을 가장해 시작되었다가, 평온한 삶에 잠재된 위선이 가감 없이 드러난 추문으로 변질되는 것,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테마이다. 여기에 『이런 사랑』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연인 클라리사와의 해후를 기념하기 위한 피크닉에서 목격한 열기구 사고가, 조 로스의 애정사, 도덕성, 사회적 입지를 뒤흔들어 놓는다. 돌풍에 휩쓸려 솟구치는 열기구 안의 소년을 구할 것인가, 나를 구할 것인가. 선의를 위해 조우한 남자들의 무리에서 살신성인한 이는 단 한 사람뿐으로, 남은 자들이 죄책감과 자기연민에 시달릴 때 조는 결코 달갑지 않은 한 남자, 제드 패리의 광폭한 사랑까지 얻게 된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대상에게 강렬한 망상적 사랑을 느끼게 되는 편집증을 '드 클레랑보 신드롬'이라고 한다. 드 클레랑보 환자는 상대의 거부를 일체 용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절대적인 애정관계를 구축해가고 있다는 확신에 흔들림이 없다. 표면적인 폭력이나 위협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회적 보호나, 반려자의 이해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 제드 패리의 맹신, 맹목적 애정 공세에, 반사회적인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오히려 뒤틀린 일상에 절망하고, 수세에 몰린 조이다.  

 

    "그의 사랑은 외부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유형이다. 설사 그 영향이 나한테서 온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세계는 내면에서 결정되고 개인적인 필요성에 의해 추동되며, 외부에 의해서 죄우되지 않았다. 그가 그르다는 것을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을뿐더러 그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줄 그 무엇도 필요없었다." 
 


     드 클레랑보 신드롬을 차용해 한 남자의 평온한 인생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로만 치부하기에는, 이언 매큐언이 정교하게 짜 넣은 장치들을 간과할 수 없다. 무신론적 성향의 순수 과학자가 되고자 했으나 좌절한 대중저술가 조와 철저하게 단절되고 고립된 채 자기만의 신앙을 키워가는 제드가 벌이는 사랑(또는 어느 증후)의 시소게임에서, 이성이나 규범은 쓸모 있는 승리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인류가 존재해온 역사만큼이나 뿌리 깊은 이분법적 대립각들이 쉴 새 없이 충돌하는 속에서 오는 혼돈의 양상이, 이언 매큐언 특유의 정제된 문체로 독자에게 휘몰아친다.

     과연 망상적 사랑의 감옥에 갇힌 이들이, 사회의 음습한 모처에서만 배양되는 것일지 의문이 남는다. 소통하지 못하는 모든 사랑이 질환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망상을 거름삼아 키워낸 애정은, 사랑의 형태로 전달된다할지라도 고통과 붕괴로 이어진다. 단절과 고립에 익숙해져가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이란 병처럼 앓아야하는 혼돈의 부산물과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못 걱정스럽다. 조와 제드의 의식의 회로에는 유사점이 많아, 사랑의 망상에 빠진 이가 누구인지 쉬이 구분가지 않는다는 클라리사의 지적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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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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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소년으로 남는 방법은, 딱 잘라 말하지만 그맘때의 죽음뿐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면 따분한 일들을 당연한 듯 해내야하는 것이 귀찮아서 네버랜드에 남기로 한 피터 팬만이 어른이 되는 굴레를 벗은 유일무이한 상징일 뿐(<양철북>의 오스카도 결국은 어른의 영역으로 넘어왔으니). 네버랜드를 어제의 그림자로 남겨두고, 자신들의 미숙했던 한 때를 편의에 의해 망각하고, 세상사의 기준에 맞추어 아이들을 재단하고 있는 이들과 늘 그런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소년’들에게 주고 싶은 책이 있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의 주인공인 중 3 유미에게는 ‘어느 날 내 친구가 죽어버렸습니다’라는 일이 생겨난다. 어이없이 죽어버린 둘도 없는 친구, 재준이가 남긴 파란 일기장의 첫 장에 쓰여 있던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하는 문구. 반듯하고 수줍음 많던 재준이가 오토바이를 타다 죽어버릴 줄 아무도 몰랐듯, 그 죽음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이들의 자기위안일 것이다.. 영원히 소년인 채로 추억으로 머물러야하는 그 녀석 대신.

     유미는 되바라진 아이이다, 아니 그렇다고들 한다. 귀고리를 하고 학교에 가면 “너 같은 애가 자라서 술집 여자가 된다”라고 귀고리를 한 담임선생님이 호통을 친다. 재혼가정 살면서 4살 박이 배다른 동생이 있는 유미는, 남들의 “그럼 그렇지, 그런 가정에서-”라는 시선을 조소할 줄 아는, 치기, 객기, 반항기로 똘똘 뭉쳐 보이지만 자기 연출만큼 불량스러운 아이가 아니다.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속내를 보여주는, 그러니까 죽어버린 재준이만큼 유미를 이해하는 친구는 다시없을 테니,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부재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예정되고, 의도된 죽음이 아니었기에, 재준이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은 남아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결코 거기 어떤 의미가 있는지 평생 알 수 없는 것도 자명하다. ‘대체 죽음이란 의미가 있어야 가치가 있는 것인가?’ 크게 되묻고 싶다. 짝사랑이지만 순정을 다해 열심히 사랑했고, 그 애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다 추락해 부서져 버린 재준이를 일기를 통해 재구성할 뿐인 유미지만, 죽는 것 이상으로 삶이란 얼마나 치열한 고행일지, 일상과 화해 아닌 화해를 하는 유미를 보는 것은 가슴 시린 경험이다.

     포르쉐를 타고 질주하다 비명횡사한 제임스 딘과는 달리 재준이는 전설적인 청춘의 아이콘이 아니다. 세상의 너그럽지 못한 기준들이 이미 설계를 마친 레일 위를 걷는 것이 이따금 버겁고, 좋아하는 아이에게 나다움을 어필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절친한 친구에게 우정을 다하는, 채플린을 꿈꿨던 인생을 채 연출하지 못한 채 저버린 영혼이다. ‘어느 날 진짜로 내가 죽어버릴’ 줄 몰랐겠지만, 내 죽음으로 인해 한 없이 약해질 이들을 떠올릴 줄도 알았던.

     학교와 부모가 아늑한 울타리가 아니라 감옥처럼 느껴진다는 재준이와 유미에게 '배부른 소리'라고 일갈해 버릴 수만은 없는 것은, 내게도 있는 전쟁같던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온 몸에 퍼져가기 때문이리라. 작가가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말처럼 "어른이 해서 나쁜 짓이 아니라면 아이가 해서도 나쁜 짓은 아니며, 아이가 해서 나쁜 짓이라면 그건 어른이 해도 나쁜 짓"이라는 몰이해와 단절을 잇는 경계없는 잣대가 절실해지는 요즘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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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여인의 속삭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6
알론소 꾸에또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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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남미문학(아니 세계문학)의 거대한 조류였던 마술적 리얼리즘, 붐 문학이 아닌, 포스트 붐 정도에 끼워 넣으면 되려나 싶을 만큼, 온전히 정치색이 배제된 이 한 권의 페루 소설은 이질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남미 소설이면 으레 담고 있기 마련인 요소들의 부재 탓에 외려 낯설기 그지없는 이중적인 감각에 빠져들었다.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콜럼비아, 이사벨 아옌데의 칠레, 마누엘 푸익의 아르헨티나에서 보아오던 반체제적인 코드들을, 알론소 꾸에또의 소설 속 페루에선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고래여인의 속삭임>은 무국적성을 띤 온갖 장르의 경계에 선 대중소설을 표방하고 있기에, 몰입과 휘발의 밸런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 여자 베로니카는, 40대의 커리어우먼으로 신문사의 국제부 부장이며, 매력적인 외모로 지금도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이 들끓는다. 지독한 마더 콤플렉스를 가진 남편이 있지만, 사춘기 아들과는 근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후가 되면 성적인 향연을 벌일 정부가 있는 그 여자 베로니카는, 삶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믿지 않은 이유가 없어 보인다. 고래 여인과 다시 맞닥뜨리기 전까지.

고래 여인, 말 그대로 거대한 몸집을 가진 또 한 여자, 레베카. 학창시절 별명은 암소. 비대한 몸집의 아이들이 그렇듯, 자신들의 잔혹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급우들의 지속적이고 파괴적인 집단광기에 시달렸던 그 여자 레베카는,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아 음울한 과거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그 몸집만큼이나 베로니카에게는 암울한 골칫거리로 다가온다.

그 시절, 베로니카와 레베카는 학교에서의 레베카의 형편없는 위상을 고려한 은밀한 친구였다. 비 호감의 무감각한 '암소'처럼 인식되긴 하나, 레베카의 지성과 내적인 성숙함은 베로니카에게 멋진 신세계로 다가왔던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움과 추함('아름답지 못한'의 단계가 아닌 추함)이 진실로 어우러질 수 없다는 듯, 그림자의 영역에서 확장되어가던 그들의 관계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졸업파티의 밤 이후, 베로니카가 의도적으로 망각했고, 레베카가 삶을 영원히 저주하게 된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진실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이별을 통보하고, 구색을 갖춘 사회생활을 위한 위태위태한 관계 속에서 가면의 삶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며 살았던 베로니카는, 자신의 실패를 감히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조롱과 혐오의 시선에 한껏 노출되어 살아온 시간에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못하는 영육이 만신창이가 된 레베카는 베로니카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인다. 유일한 구원을 저버린 배신행위, 가면 뒤의 진실의 잔상을 감내해야하는 두 여인이 벌이는 심리게임은 완전한 화해로 끝나지 못하지만, 진실을 마주할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에는 성공했다.

알론소 꾸에로는 중년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여성이 여성으로 존재하려는 몸부림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그려냈다. 그가 천착하는 테마를 위해 영성 이상으로 여성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듯 해보이지만, 도식화된 코드를 사용하는 탓에 꾸에로의 여성들은 견본품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페루의 리마가 아닌, 뉴욕이나 도쿄에 사는 40대 여성들이라고 바꾸어놓아도 무방한 클리셰들이 앞서 말한 몰입과 휘발의 밸런스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무개성적으로도 만든다.

남미문학이 쿠데타와 마술적 리얼리즘의 그림자를 벗고, BBC의 세계명작드라마와 <섹스 앤 더 시티>류의 미드, 여성의 몸을 말하는 분방함을 얻기까지, 한 번 고착화된 관념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일갈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유혈과 내전대신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여성미의 기준이 얼마나 아름답지 못한 집단광기인지를 지적하는 시대적 고민을 성찰하는 이 한 권으로 '틀'에서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한다. 소득과 의식수준이 높은 선진국의 여성일수록 마른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통계에 광적으로 얽매여있는 시류야말로, 상담과 치료가 절실한 것 아닐까. 과연 언제까지 고래여인에게 돌을 던질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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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 -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일깨워 주는
아일린 쿠퍼 지음, 정선심 옮김, 가비 스비아트코브스카 그림 / 두레아이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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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살이 통통히 오른 붉은 볼의 사내 아이 주변으로, 물고기, 코끼리, 학, 비둘기 등 한 눈에 봐도 뭔가 종교적인 상징물로 여겨지고 있는 동물들이 가득 그려있다. 프레스코 화에 칠해진 회반죽처럼 두터운 질감의 삽화가 어지러이 보일만도 한데, 반듯한 이마, 투명한 눈망울, 꽃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세상의 온갖 오점에 물들지 않은 무구한 아이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산만한 배경에 강한 흡입력을 부여한다.


굳이 저자의 이력을 확인하지 않아도 책장을 넘기면 등장하는 '할아버지'가 랍비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유대의 교리와 진리를 전하는 이야기인가 싶지만, <황금률(Golden Rule)>이란 뭔가 보편적이자 초월적인 삶의 법칙임을 이내 짐작할 수 있다. 랍비 할아버지와 아이의 문답이 진행될수록 사소한 깨달음이 어떻게 세상의 질서를 조화롭게 하는지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도 볼 수 있는 "네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의 변형이 되긴 했지만 동일한 의미를 지닌 종교적인 계율, 격언, 고사들이야말로 유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황금률을 담고 있는 그릇이 아닐까? 선민사상, 피의 복수, 성스럽지 않은 성전, 인습과 결탁한 족쇄로서가 아닌 종교 본연의 핵에 다다르면 발견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풀이가 랍비의 입을 통해 진중하게 흘러넘친다.


검은 색 일색의 차림과 수염, 키파를 쓴 랍비 대신, 가사를 두른 승려, 로만 칼라를 입은 신부, 또는 브라만이나 이슬람 사제가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구성은 황금률이 가진 보편적이기에 더욱 귀중하고, 그만큼 쉬이 지나치게 되는 현실의 문제를 되짚는다. 유혈과 분쟁으로 얼룩진 바로 내 곁의 세상사를 떠올려보면, 단순한 것일수록 지키기 힘들다는 자조가 절로 나오지 않는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황금률을 실천하게 할 수는 없지만, 딱 한 사람만 황금률을 실천하면 그만인 문제인 것을. 바로 '나'부터. 남에게서 황금률의 실천을 목도하기를 바라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행하는 황금률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든다-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설파하기 위해선, 이 책을 골라주는, 읽어주는 이들이 황금률을 실천하는 역할모델이 될 필요가 절실하진 않은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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