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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발적으로 발생한 불운이 소중한 것들을 송두리째 전복하고, 인생의 향로를 바꾼다. 브리오니는 언니의 정사를 목격함으로서(『속죄』), 헨리 퍼론은 사소한 접촉사고에서(『토요일』), 클라이브 린리에게는 등산길에서 목격한 폭행사건(『암스테르담』)이 그렇다. 우연을 가장해 시작되었다가, 평온한 삶에 잠재된 위선이 가감 없이 드러난 추문으로 변질되는 것,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테마이다. 여기에 『이런 사랑』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연인 클라리사와의 해후를 기념하기 위한 피크닉에서 목격한 열기구 사고가, 조 로스의 애정사, 도덕성, 사회적 입지를 뒤흔들어 놓는다. 돌풍에 휩쓸려 솟구치는 열기구 안의 소년을 구할 것인가, 나를 구할 것인가. 선의를 위해 조우한 남자들의 무리에서 살신성인한 이는 단 한 사람뿐으로, 남은 자들이 죄책감과 자기연민에 시달릴 때 조는 결코 달갑지 않은 한 남자, 제드 패리의 광폭한 사랑까지 얻게 된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대상에게 강렬한 망상적 사랑을 느끼게 되는 편집증을 '드 클레랑보 신드롬'이라고 한다. 드 클레랑보 환자는 상대의 거부를 일체 용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절대적인 애정관계를 구축해가고 있다는 확신에 흔들림이 없다. 표면적인 폭력이나 위협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회적 보호나, 반려자의 이해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 제드 패리의 맹신, 맹목적 애정 공세에, 반사회적인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오히려 뒤틀린 일상에 절망하고, 수세에 몰린 조이다.
"그의 사랑은 외부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유형이다. 설사 그 영향이 나한테서 온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세계는 내면에서 결정되고 개인적인 필요성에 의해 추동되며, 외부에 의해서 죄우되지 않았다. 그가 그르다는 것을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을뿐더러 그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줄 그 무엇도 필요없었다."
드 클레랑보 신드롬을 차용해 한 남자의 평온한 인생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로만 치부하기에는, 이언 매큐언이 정교하게 짜 넣은 장치들을 간과할 수 없다. 무신론적 성향의 순수 과학자가 되고자 했으나 좌절한 대중저술가 조와 철저하게 단절되고 고립된 채 자기만의 신앙을 키워가는 제드가 벌이는 사랑(또는 어느 증후)의 시소게임에서, 이성이나 규범은 쓸모 있는 승리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인류가 존재해온 역사만큼이나 뿌리 깊은 이분법적 대립각들이 쉴 새 없이 충돌하는 속에서 오는 혼돈의 양상이, 이언 매큐언 특유의 정제된 문체로 독자에게 휘몰아친다.
과연 망상적 사랑의 감옥에 갇힌 이들이, 사회의 음습한 모처에서만 배양되는 것일지 의문이 남는다. 소통하지 못하는 모든 사랑이 질환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망상을 거름삼아 키워낸 애정은, 사랑의 형태로 전달된다할지라도 고통과 붕괴로 이어진다. 단절과 고립에 익숙해져가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이란 병처럼 앓아야하는 혼돈의 부산물과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못 걱정스럽다. 조와 제드의 의식의 회로에는 유사점이 많아, 사랑의 망상에 빠진 이가 누구인지 쉬이 구분가지 않는다는 클라리사의 지적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