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여인의 속삭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6
알론소 꾸에또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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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남미문학(아니 세계문학)의 거대한 조류였던 마술적 리얼리즘, 붐 문학이 아닌, 포스트 붐 정도에 끼워 넣으면 되려나 싶을 만큼, 온전히 정치색이 배제된 이 한 권의 페루 소설은 이질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남미 소설이면 으레 담고 있기 마련인 요소들의 부재 탓에 외려 낯설기 그지없는 이중적인 감각에 빠져들었다.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콜럼비아, 이사벨 아옌데의 칠레, 마누엘 푸익의 아르헨티나에서 보아오던 반체제적인 코드들을, 알론소 꾸에또의 소설 속 페루에선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고래여인의 속삭임>은 무국적성을 띤 온갖 장르의 경계에 선 대중소설을 표방하고 있기에, 몰입과 휘발의 밸런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 여자 베로니카는, 40대의 커리어우먼으로 신문사의 국제부 부장이며, 매력적인 외모로 지금도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이 들끓는다. 지독한 마더 콤플렉스를 가진 남편이 있지만, 사춘기 아들과는 근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후가 되면 성적인 향연을 벌일 정부가 있는 그 여자 베로니카는, 삶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믿지 않은 이유가 없어 보인다. 고래 여인과 다시 맞닥뜨리기 전까지.

고래 여인, 말 그대로 거대한 몸집을 가진 또 한 여자, 레베카. 학창시절 별명은 암소. 비대한 몸집의 아이들이 그렇듯, 자신들의 잔혹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급우들의 지속적이고 파괴적인 집단광기에 시달렸던 그 여자 레베카는,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아 음울한 과거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그 몸집만큼이나 베로니카에게는 암울한 골칫거리로 다가온다.

그 시절, 베로니카와 레베카는 학교에서의 레베카의 형편없는 위상을 고려한 은밀한 친구였다. 비 호감의 무감각한 '암소'처럼 인식되긴 하나, 레베카의 지성과 내적인 성숙함은 베로니카에게 멋진 신세계로 다가왔던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움과 추함('아름답지 못한'의 단계가 아닌 추함)이 진실로 어우러질 수 없다는 듯, 그림자의 영역에서 확장되어가던 그들의 관계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졸업파티의 밤 이후, 베로니카가 의도적으로 망각했고, 레베카가 삶을 영원히 저주하게 된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진실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이별을 통보하고, 구색을 갖춘 사회생활을 위한 위태위태한 관계 속에서 가면의 삶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며 살았던 베로니카는, 자신의 실패를 감히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조롱과 혐오의 시선에 한껏 노출되어 살아온 시간에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못하는 영육이 만신창이가 된 레베카는 베로니카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인다. 유일한 구원을 저버린 배신행위, 가면 뒤의 진실의 잔상을 감내해야하는 두 여인이 벌이는 심리게임은 완전한 화해로 끝나지 못하지만, 진실을 마주할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에는 성공했다.

알론소 꾸에로는 중년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여성이 여성으로 존재하려는 몸부림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그려냈다. 그가 천착하는 테마를 위해 영성 이상으로 여성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듯 해보이지만, 도식화된 코드를 사용하는 탓에 꾸에로의 여성들은 견본품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페루의 리마가 아닌, 뉴욕이나 도쿄에 사는 40대 여성들이라고 바꾸어놓아도 무방한 클리셰들이 앞서 말한 몰입과 휘발의 밸런스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무개성적으로도 만든다.

남미문학이 쿠데타와 마술적 리얼리즘의 그림자를 벗고, BBC의 세계명작드라마와 <섹스 앤 더 시티>류의 미드, 여성의 몸을 말하는 분방함을 얻기까지, 한 번 고착화된 관념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일갈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유혈과 내전대신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여성미의 기준이 얼마나 아름답지 못한 집단광기인지를 지적하는 시대적 고민을 성찰하는 이 한 권으로 '틀'에서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한다. 소득과 의식수준이 높은 선진국의 여성일수록 마른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통계에 광적으로 얽매여있는 시류야말로, 상담과 치료가 절실한 것 아닐까. 과연 언제까지 고래여인에게 돌을 던질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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