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여왕>을 리뷰해주세요.
눈의 여왕 - 안데르센 동화집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5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김양미 옮김, 규하 그림 / 인디고(글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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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 시리즈의 경우, 영미권에서는 출간 당시부터 아동용과 성인용으로 구분되어 나온다. 페이퍼백과 하드커버의 분류가 아니라, 지하철에서 틈새독서를 하는 성인들을 위해 최대한 동화스럽지 않게 커버 디자인을 달리 해서 출간하는데, 상당히 호평을 받는다고 한다. 동화는 어린이들의 영역이라고 규정해버리고, 절대 경계를 넘지 않는 성인들은 예나지금이나 도처에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성인이 되면 동화에서 '졸업'해야 한다"고 헌법에라도 쓰여 있는 걸까?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의 최신간인 <눈의 여왕>. 성인을 위한 고전물임을 표방하며, 감각적인 순정만화 스타일의 일러스트로 확실한 눈길을 끌고 있다. 전작들처럼 다이어리만한 크기로 나와 손가방이 아니라 외투주머니에도 쏙 들어가는 '포켓 사이즈'여서 휴대하기마저 편하다. 기존의 안데르센 완역 전집이나 파랑새주니어에서 나온 초거대 안데르센 양장 '빅북'에 비교했을 때, 성인들의 틈새독서를 위한 맞춤형 고전출판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선호하는 팬층도 상당히 확보된 이 시리즈의 <눈의 여왕>에는 '눈의 여왕', '인어공주', '나이팅게일'. '백조왕자', '장난감병정'. '성냥팔이 소녀'가 수록되어 있는데, 기껏 성인들을 위한 고전이라고 명명한 출간의 묘를 살리지 못하는 안일한 선집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생각의 나무에서 전 7권으로(그리고 합본으로) 출간한 『헤럴드 블룸 클래식』은 '모든 나이대의 가장 총명한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이야기'가 원제인데, 이 선집에는 안데르센 동화 가운데 '빨간 구두'가 수록되어 있다. 메이저급의 동화들보다 정말 아이들을 위한 동화인지 의심이들만한 불온하고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동화들로 선별되었다면, 말 그대로 '성인을 위한' 안데르센 선집이 되지 않았을지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 각광받는 클래식동화들의 거대한 주석판과는 다른 노선을 가졌기에, 단출한 모양새가 감점은커녕 개성적으로 다가온다. 클래식동화야말로 그 자체가 가장 광범위한 고전이기 때문에, 장정을 달리하기만 하면, 아동도서와 성인문학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재미있다. 안데르센 동화처럼 전래동화와 창작동화 사이의 가교가 되어주는 낭만주의 시대의 치열한 아동문학은, '아이를 졸업한 성인'이기에 어쩌면 더욱 참신하게 느껴지는 재독의 시간을 갖게 한다.

일일이 해석하고, 논문을 방불케 하는 방대한 주석을 달아 출간하는 것만이 고전을 재발견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6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안데르센 동화는, '빨간 구두'처럼 표면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진 않지만, 마냥 아름답게만 읽히던 때와는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안데르센 동화 특유의 심연에 내재된 일그러진 정치성을 희석시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가장 커다란 메리트이기도 한, 팬시 다이어리를 연상케 하는 현란한 일러스트와 미니멀한 크기에서 오는 장식성이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휴대하기 좋은 포켓 사이즈라 외출시의 틈새독서에 안성맞춤이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파랑새 주니어의 빅북시리즈 [안데르센 전집], 비교 체험 극과극을 보장하는 압도적인 사이즈!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소장가치가 있는 클래식동화를 선호하는 성인층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아이들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따스하고 눈부신 여름이었습니다."(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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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구스타 쿠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 3
이겸 지음 / 은행나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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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잘 읽지 않는다. 지난 해 양질의 여행기가 쏟아져 나왔을 때조차, 광풍에 동참하지 않은 채, 방구석에 들어앉아 서가를 채운 책들을 더 분주하게 만났다. 기피하는 장르여서가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을 돌며 길에서만 깨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의 성찰이 한 없이 부러웠기 때문에, 굳이 말하자면 속 좁은 질투 탓에. 그런 사정으로 묵혀둔 한 권의 여행기를 꺼내들게 된 것은 이즈음 다시 들려오는 가슴 먹먹한 어느 혁명가의 이름 때문이었다.

유년 시절의 쿠바는 케네디 시절의 미사일 위기, 성년에 이르렀을 때는 부에나 비스타 쇼셜 클럽과 체 게바라의 나라였다. 카스트로와 미국의 불편한 관계의 진실이랄지, 피델 카스트로의 와병 이후의 쿠바의 정치상황이랄지, 경제 제재 속의 몰락한 쿠바 경제 등등. 온통 마이너스한 이미지로 가득한 서인도 제도의 고립된 섬이, 손 리듬으로 들썩이고, 별이 새겨진 베레모를 눌러쓴 혁명가의 나라로 전환되는가 싶더니, 결국 또 거기서 정체되어 버리진 않았는지. 

쿠바에 대한 일반적 환상과 현실의 거리를 적절히 풀어내주는 너무나 반가운 한 권의 여행기, <메구스타 쿠바>. 사진작가 이겸은 한 달간의 쿠바 체류를 통해, 쿠바의 말간 맨얼굴을 가감 없이 전한다. 그의 문장은 글 잘 쓰는 블로거 이웃마냥 모나지 않은 평범함에 편안하고, 그의 사진은 현란한 기교 없이 작고 낮은 것들을 포용한다. 낡고 허름한 것들로 넘쳐나지만, 결코 남루하지 않은 소박한 멋이 일품인 쿠바는 죽은 혁명가의 성소가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여전히 혁명이 필요한 땅이다.

쿠바로 떠나기 전 '위험한 나라'라는 진지한 조언을 들었다는 그의 인상적인 반문, "한국인이 쿠바거리를 걷는 것보다, 쿠바인이 한국의 밤거리를 걷는 것이 훨씬 위험할 것이다". 경제 제재는 부족한 물자를 최대한 이용하고, 생명이 다한 것들마저 필요에 의해 새 생명을 부여한다. 40-50년 된 연륜의 차들은 올드 카의 명함에도 내밀지 못하고, 도심을 벗어나면 공공연히 말과 마차가 다닌다. 수돗물은 수압이 형편없고, 자주 끊긴다. 바싹 마른 초지의 뼈를 드러낸 가축들에 서글퍼져오기도 하지만, 일급휴양지와 고급호텔이 즐비한 특구화한 지역도 공존하는, 평등하지만은 않은 저마다의 가난에, 자신의 편견을 수정해나가는 이겸의 시선을 분주히 따라다니게 된다.

식민지배와 혁명 기념물이 산재한 지역색 강한 쿠바의 이모저모를 둘러보는 일에 숨이 가빠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쿠바인들에 대한 호의, 즉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깨끗한 음질의 부에나 비스타 쇼셜 클럽 관련 음악에 익숙한 관광객들에게 현지음악은 그리 고도의 수준으로 들리지 않을 거라며 못내 궁금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곧이어 흥겨워하는 그네들의 춤사위와 현실을 잊고, 뛰어넘게 만드는 생활 속의 작은 예술을 찬미하는 식이다. 관광객에게만 부과되는 고도의 물가에도 관광수익 아니면 빵을 살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기도 하고. 쿠바식 민박에서 만난 할머니들을 'mom'이라 부르며 다가갈 줄 아는 이라서 그네들의 호의 또한 왜곡되지 않고 통했을 것이 분명하다. 

백인, 물라토, 흑인, 중국계 등등 다양한 인종이 얽혀 사는 탓에 인종차별이 드물고, 까무잡잡한 피에타가 서 있는 성당들이 인상적이며, 사회주의 국가답게 성차별도 느껴지지 않지만, 미래를 꿈 꿀 수 없는 고립된 섬에 사는 젊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난다. 여행길 위에서라 더욱 피부에 와 닿는 쿠바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소소한 전언들도 그 땅의 사람들을 한층 가까이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창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겸의 "메구스타 쿠바(쿠바를 좋아한다)"라는 선언에 간단히 동승해버리려다가 주춤한다. 그가 발견해낸 쿠바와는 다른, 나만의 쿠바를 알아간 후에라도 늦지 않을 고백 같기에. 여행길에 만나는 이들을 온전히 바라보려는 그의 시선 하나쯤은 가지고와도 괜찮을 것도 같고. 문 밖을 박차고 나서는 순간 쿠바의 반을 아는 것이라는 말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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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늑대 세 마리와 못된 돼지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74
헬린 옥슨버리 그림, 유진 트리비자스 글, 김경미 옮김 / 시공주니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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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돼지 삼형제>>를 패러디한 재기 넘치는 그림책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 [아기 늑대 세 마리와 못된 돼지]는, 어딘가 모르게 개구지고 풍자적인 삽화를 잘 그리는 헬린 옥슨버리와 국내에는 그리 소개되지 않은 유진 트리비자스가 공동작업한 책입니다. 타이틀에서 예고한 것처럼 이 책의 '악의 축'은 늑대가 아닌 돼지, '크고 못된 돼지'입니다. 보송보송한 솜털, 조금은 맹해 보이는 인상의 아기 늑대 세 마리가, 크고 못된 돼지의 역습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지, 원작의 전복과 더불어 심상치 않은 웃음의 코드가 예고되는 듯 합니다. 

독립을 했다 해도 솜털이 보송한 아기 늑대들은 각자 딴 집 살림을 차리는 게 아니라 '뭉치면 산다'는 모토하에 스위트 홈을 함께 꾸려 나갑니다. 착한 사람, 아니 착한 늑대들이 살기엔 험한 세상이라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건만, 처음 만난 동물들(캥거루, 비버, 코뿔소,홍학)에게 집 지을 재료를 얻어내는 솜씨를 보자니 괞한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쁜 세상도, 영 쑥맥인 늑대들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늑대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을 가만두고 보지 못하는 심술꾼, 크고 못된 돼지가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등장하고, 원작에서 자기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늑대에게 속 시원한 복수라도 할 요량인지, 패러디를 빌미로 마음껏 횡포를 부립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못되고 못되었는데도, 안쓰러운 것은 돼지일지도 모르겠다고 마음이 쓰이는 건 왜일까요? 저렇게 순진무구한 얼굴로 '절대로 문 열어 주지 않을 거야! 우리 집에서 차 마시는 건 꿈도 꾸지마!"라고 딱 잘라 돼지를 내 치는 늑대들이 오히려 지속적인 불신과 파괴를 부르는 것은 아닌지, 더 이상 흑백의 세계에서만 머물지 않게 된, 영악한 독자는 이미 눈치를 채게 됩니다. 그 때 그 시절, 짚단, 나뭇가지, 벽돌로 진화하던 집 짓는 재료가 오로지 크고 못된 돼지가 자기들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벽돌, 콘크리트, 강철판으로 요새를 방불케 하는 견고함으로 변해갑니다. '후~' 불어서는 날려버릴 수 없는 완벽시공을 자랑하는 늑대들만의 집 짓기 신공은, 마음 착한 이웃들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만들어진 집이긴 하지만, '친절'과 '배려'라는 성분까지 담아낼 수는 없었던 건 아닐까요? 

  반전이 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래동화의 정석대로 권선징악으로 악당이 퇴치되는 불문율에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소싯 적 폭력과 협박을 일삼던 껄끄러운 과거를 가진 이웃이 개과천선하는 것이 식상한 결론이라고 치부하지 않을 너그러움 쯤은 필요한 것도 같습니다. 착하게 착하게, 둥글게 둥글게 끝나는 그림책의 공식과 닮은 듯 다른 재미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길 수 있는 경계없는 사고는 넉넉했으면 좋겠습니다.

E.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에서, 인도의 이슬람교도 아지즈는 본토에서 건너와 거들먹거리는 영국인들과는 달리, 계급의식 없는 대학 학장인 필딩에게, 서로가 친구가 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친절하게, 더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아지즈와 필딩처럼 인종과 계급이 다른 이들이 진정으로 교류할 수 있는 길은 그리 어려울 것 없어 보여도,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겹겹의 장벽으로 뒤 덮여 있습니다. 하물며 늑대들과 돼지, 돼지들과 늑대처럼 종족마저 다른 우리의 주인공들이 유쾌한 티타임을 함께 할 수 있으려면, 견고한 성채보다 향기로운 친절이 더 절실하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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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평전 -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리더
롤랜드 헌트포드 지음, 최종옥 옮김 / 뜨인돌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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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거둔 탐험가들. 예컨대 남극까지 1,328킬로미터를 썰매로 달리면서 엄격한 일정에 따라 썰매를 끌던 개들을 잡아먹고, 네 동료 가운데 하나가 치통에 걸린 것 외에는 동상, 괴혈병, 설맹의 근처에도 가지 않고 말짱하게 돌아온 초실용적인 노르웨이인 로알드 아문센 같은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즐비하게 늘어선 영국인 극지방 탐험 실패자들 가운데 아문센에게 패배한 로버트 팰컨 스콧 대령만큼 낭만적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간직해 왔다."(앤 페디먼의『서재 결혼시키기』, 46p)

나 또한 앤 페디먼과 유사한 이유로 남극점 정복을 위한 세기의 경쟁에서, 아문센의 승리보다 스콧의 패배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페디먼 여사의 말마따나 "스콧의 마지막 일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도 슬프다". 그리고 아문센과 스콧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레 탐험시대의 마지막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니스트 섀클턴으로 귀착한다.

섀클턴의 세 번째 남극탐험이자, 그에게 '위대한 실패자'라는 명칭을 갖게 한 '인듀어런스호의 탐험'에 관한 알프레드 랜싱(『섀클턴의 위대한 항해)』)과 캐롤라인 알렉산더(『인듀어런스』)의 저서로, 이미 탐험의 소상한 과정을 쫓은 적이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섀클턴에 관한 저작들을 찾아 헤매다보면 만나게 되는 것은 롤랜드 헌트포드의 『섀클턴 평전』과 어니스트 섀클턴의 자서전 『SOUTH』이다. 물론 탐험대원들의 일기와 증언이 동일하게 인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네 권의 책을 읽다보면 28명의 인듀어런스 대원들의 면면히 상세하게 그려지기까지 한다.

그 중에서 『섀클턴 평전』은 인듀어런스 호의 여정만이 아니라, 섀클턴의 네 차례에 걸친 남극탐험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방대한 책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책들과 사뭇 다른 시각에서 섀클턴을 조명한다. 단언하건대, 1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속에는, 추문과 폭로로 얼룩진 스콧과 섀클턴의 관계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탓에, 당혹감과 더불어 널리 고착되어왔던 탐험가들의 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까지 제공하고 있다.

스콧의 1차 남극탐험에 동행했던 젊은 날의 섀클턴에 대해, 기존의 책들에서는 '괴혈병으로 인해 남극점 정복에 실패했다'는 간단한 언급만이 나와 있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스콧과 섀클턴의 뿌리 깊은 반목은 스콧이 죽기 전까지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노르웨이인들의 경험과 조언으로도 극지방에서의 썰매개와 스키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 영국 탐험대의 태도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썰매개를 조련하지 않고, 스키를 제때 배워두지 않아서 스콧, 윌슨, 섀클턴은 손수 썰매를 끌며 북구의 탐험대들이라면 수월하게 갔을 여정을, 미련스럽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방법으로 주파하려한다. 추위와 배고픔, 질병에 시달리며 썰매를 끄는 탐험대의 행렬이라니, 그들이 살아돌아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스콧은 섀클턴이 자신의 부족한 리더십을 위협한다고 느껴지자, 노골적으로 모욕과 수치를 준다. 천식과 괴혈병으로(거기다 섀클턴은 심장에 이상이 있었다)으로 가장 위독한 상태에 이른 섀클턴을 썰매에 태우고 기지로 돌아와야 했던 스콧은 영국으로 귀환했을 때, 탐험의 실패를 섀클턴의 병으로 돌린다. 섀클턴은 분노와 수치에 치를 떨며 스콧보다 약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2차 탐험을 계획한다.

섀클턴의 2차 남극탐험은 국가적 원조가 아니라 개인적 탐험의 일환으로 추진되는데, 그의 인간적 매력에 빠져든 후원자들이 거금을 내는 형식보다는, 대출보증을 서주는 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탐험 이외의 모든 분야에서 실패와 빚더미에 허덕이는 그에게 남극을 정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명예와 부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콧은 섀클턴에게 자신의 1차 탐험 당시의 항로의 독점권을 주장하며 각서를 요구하기까지 하는데, 결국 이를 지키지 못한 섀클턴을, 스콧은 죽을 때까지 비방을 멈추지 않고 저주를 일삼는다. 

앤 페디먼과 같은 이들이 인간적인 매력이라고 해석하는, 영국탐험대들의 낭만주의적 성향, 즉 썰매개나 스키도 없이 실패한 선례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할 뿐인 그들의 행적에 대한 저자의 일갈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 이후에도 10여 년 동안 계속하여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음은 영국 극지방탐험의 역사에서 '영웅시대'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치장되었다. 하지만 많은 영웅주의가 그러하듯이 그것을 불필요한 낭비였고 무능함을 감추는 껍데기일 뿐, 한 마디로 말해 섀클턴 일행은 스스로 만사를 어렵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201p) 

섀클턴이 썰매개 대신 말을 이끌고 88도 23분까지 도달했던 기록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아문센을 비롯한 북구의 탐험가들은 섀클턴이 잘 조련된 썰매개와 장비를 구비했다면 분명 남극점을 정복하고도 남았을 거라고 극찬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스콧은 섀클턴의 실패를 거울삼지도 않은 채, 극지탐험에서는 무익할 뿐임이 증명된 말을 이끌고 결국 돌아오지 못할 극점을 향한 탐험을 하게 되는데, 스콧의 일기에는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설과 비방이 가득 적혀있기도 했다고 한다. 스콧의 <남극일지>는 대필 작가의 각색과 스콧 미망인의 편집을 통해, 지금 같은 형태로 출간되었다니, 역시 진실이 가진 힘은 때때로 고약하기 그지없다.  

20세기 초, 극지탐험에 관한 유럽 국가들의 각축은 냉전시대의 '우주전쟁', 달에 깃발을 꽂으려는 암투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새로운 항로와 정복자의 이름을 붙여 완성되어가는 극지도, 미지의 대륙에 대한 독점권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엘도라도였다. 무사 귀환한 탐험가들은 당국의 민관외교관으로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동원령에 이용되거나, 단교중인 국가와의 관계회복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각광받는 인사였다. 당시 극지탐험에 있어 독보적인 업적을 연일 갱신하는 노르웨이에 비해, 스러져가는 대영제국의 황혼을 유예시키기 위해서는 영웅의 존재가 절실했던 영국의 상황을 이해하면, 불멸의 영웅으로 거듭난 스콧의 사례는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남극을 통해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한 번도 감추려하지 않았던 섀클턴은, 기사작위와 세간의 명성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손을 대는 모든 일에 실패한 생활인 섀클턴, 아내 에밀리에게만 충실하지 못한 남편 섀클턴, 이제는 경쟁할 수도 없이 영웅으로 산화해버린 스콧을 뛰어넘으려는 탐험가 섀클턴, 그는 극을 꿈꾸고, 실행하고, 좌초하더라도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 무한 극한의 상황에서가 아니면 진가를 발휘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세 번째 탐험이자 섀클턴을 불세출의 리더로 인정받게 만든 인듀어런스 호의 남극횡단탐험의 장에 이르자, 아이러니하게도 저자는 남극탐험을 둘러싼 전혀 명예로울 것 없는 폭로와 추문으로 독자의 불편한 오감을 자극하던 것을 잊은 듯 보인다.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의 허장성세와 다를 바 없던 웨들 해를 항해한 후, 남극을 횡단, 로스 해를 통해 귀환하겠다는 섀클턴의 준비되지 않은 탐험에 무엇보다 할 말이 많아 보일 것 같은 저자가 기존의 전기 작가들과 다를 바 없이 섀클턴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찌 보면 무수한 섀클턴 관련저서들이 '인듀어런스'에 이르면 동어반복과도 같은 서술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아무런 불만 없이 수긍해버리고 마는 내가 있다. 약 2년에 걸친 인듀어런스 호의 28명의 대원들의 문명으로의 귀환은 정말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

섀클턴이 얼마나 역경의 상황에서 뛰어난 리더였는지에 대해 이견을 갖거나, 추앙을 보태고 싶지 않다.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목적의식도 없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퀘스트 호를 타고 떠났던 남극탐험에서 고질적인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하는 섀클턴.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로 귀환한 후, 유명세와 언론의 취재경쟁에서 벗어난 이후, 오히려 자신의 생의 목적을 잃고 좌초해버리고 마는 사례처럼, 섀클턴은 극지방에서의 극한의 도전 속에서만 초신성의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영웅시대'의 마지막 탐험가였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뿐이다. 남극을 꿈꾸고, 정복하려했지만 오히려 정복당한 것은 섀클턴 자신이었을지언정.

아마추어에 불과한 급조된 탐험대, 무지와 편견 탓에 영양실조와 괴혈병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던 식단, 선진적인 최신 장비와 기술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던 영국탐험대의 전통, 오로지 결과만이 상쇄시킬 수 있는 투명하지 못한 탐험을 둘러싼 이권다툼 속에서 어니스트 섀클턴이 그토록 분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본다. 준비 부족과 잘못된 계획으로 종종 대원들을 사지에 몰아넣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대장'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충분히 자각하고 책임지려한, 그리고 책임을 완수한 흔치 않은 인간이었다. 그의 불멸은 낭만주의 발로에서 비롯한 영웅시대의 조작된 위안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의 영역에서 완성된 위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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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이유정 푸른숲 작은 나무 13
유은실 지음, 변영미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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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은실 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배를 움켜쥐고 눈물이 날 때까지 웃다가도, 어느새 서글퍼져 코끝이 시큰해지곤 한다. 까막눈 마고할미의 수상쩍은 춤사위를 엿보았을 때도(『우리 집에 온 마고할미』), 늘 피곤한 엄마에게 자라탕을 사주는 게 소원인 비읍이를 만났을 때도(『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아들과 이름이 같은 시인 백석의 시가 황망하기만 한 '대거리 닭집' 사장님을 비롯한 여러 인물군상과 마주쳤을 때도(『만국기 소년』) 여지없이, 울다 웃느라 눈물이 찔끔 나곤 했다.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멀쩡한 이유정』은 일상에서 발굴한 독특한 웃음 속에 애잔한 눈물샘을 알게 모르게 숨겨 둔 것만 같은, 너무나 '유은실'적인 코드로 가득한, 아니 한층 파워업한 동화집이다.

     도둑 잡은 경찰도 아니고, 조기축구 회장도 아닌, 술주정뱅이에 노름꾼 할아버지 이야기를 소개해야만 하는 심란한 경수(<할아버지 숙제>), 동생 낳으러 입원하는 엄마와의 잠시의 이별에 숙제고, 학원이고 마냥 해방 같아 좋기만 한 진이(<그냥>), 총명탕까지 지어먹었는데도 어쩌다 생긴 흉터가 아니었으면 왼손, 오른손도 구분하지 못했을 초절정 길치 유정이(<멀쩡한 이유정>), 난생처음 근사하게 느끼하다는 자장면을 맛 본 손자에게 내친 김에 왕새우를 사주려다 대형마트와 '철수레(카트)'의 압박에 좌절한 할아버지와 기철이(<새우가 없는 마을>), 딴 애들 아빠는 살려주고, 우리 아빠만 죽게 만든 하나님부터 온 세상이 불공평한 것 투성이인 영지(<눈>)를 만난 이번에도 깔깔거리게 되는 동시에 헛헛함이 밀려들었다.

     창피한 일이라면 일단 무조건 숨기고, 체면치레를 위해 그럴 듯한 포장을 덧씌워놓으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편의적인 오해를 한다. 부끄러운 과거사나 유별난 습벽, 모든 일에 사소해져야 마땅할 것 같은 가난, 한부모 가정의 아이의 뿌리 깊은 외로움 등은 세간의 기준으로 볼 때 감추어두고만 싶은 불편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평범함을, 그러니까 안전하다는 감각을 주는, 어디 하나 불거진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가장해야 하는 이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는 결코 만만치가 않다.

     『멀쩡한 이유정』에서 한층 강화된 유은실적인 코드가 느껴졌다면, 그것은 남루한 일상과 마주보고, 때로는 더 애쓰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사소하지만 지나쳐버리기 십상인 것들을 끌어안으려는 진솔함 때문일 것이다. 궁핍하고 결핍되어 있는 일상에 산다 해서, 왠지 모를 죄스러움을 가져야할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고, 힘들 땐 힘내는 것보다 힘든 채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세상의 모든 이유정들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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