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클턴 평전 -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리더
롤랜드 헌트포드 지음, 최종옥 옮김 / 뜨인돌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성공을 거둔 탐험가들. 예컨대 남극까지 1,328킬로미터를 썰매로 달리면서 엄격한 일정에 따라 썰매를 끌던 개들을 잡아먹고, 네 동료 가운데 하나가 치통에 걸린 것 외에는 동상, 괴혈병, 설맹의 근처에도 가지 않고 말짱하게 돌아온 초실용적인 노르웨이인 로알드 아문센 같은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즐비하게 늘어선 영국인 극지방 탐험 실패자들 가운데 아문센에게 패배한 로버트 팰컨 스콧 대령만큼 낭만적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간직해 왔다."(앤 페디먼의『서재 결혼시키기』, 46p)

나 또한 앤 페디먼과 유사한 이유로 남극점 정복을 위한 세기의 경쟁에서, 아문센의 승리보다 스콧의 패배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페디먼 여사의 말마따나 "스콧의 마지막 일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도 슬프다". 그리고 아문센과 스콧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레 탐험시대의 마지막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니스트 섀클턴으로 귀착한다.

섀클턴의 세 번째 남극탐험이자, 그에게 '위대한 실패자'라는 명칭을 갖게 한 '인듀어런스호의 탐험'에 관한 알프레드 랜싱(『섀클턴의 위대한 항해)』)과 캐롤라인 알렉산더(『인듀어런스』)의 저서로, 이미 탐험의 소상한 과정을 쫓은 적이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섀클턴에 관한 저작들을 찾아 헤매다보면 만나게 되는 것은 롤랜드 헌트포드의 『섀클턴 평전』과 어니스트 섀클턴의 자서전 『SOUTH』이다. 물론 탐험대원들의 일기와 증언이 동일하게 인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네 권의 책을 읽다보면 28명의 인듀어런스 대원들의 면면히 상세하게 그려지기까지 한다.

그 중에서 『섀클턴 평전』은 인듀어런스 호의 여정만이 아니라, 섀클턴의 네 차례에 걸친 남극탐험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방대한 책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책들과 사뭇 다른 시각에서 섀클턴을 조명한다. 단언하건대, 1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속에는, 추문과 폭로로 얼룩진 스콧과 섀클턴의 관계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탓에, 당혹감과 더불어 널리 고착되어왔던 탐험가들의 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까지 제공하고 있다.

스콧의 1차 남극탐험에 동행했던 젊은 날의 섀클턴에 대해, 기존의 책들에서는 '괴혈병으로 인해 남극점 정복에 실패했다'는 간단한 언급만이 나와 있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스콧과 섀클턴의 뿌리 깊은 반목은 스콧이 죽기 전까지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노르웨이인들의 경험과 조언으로도 극지방에서의 썰매개와 스키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 영국 탐험대의 태도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썰매개를 조련하지 않고, 스키를 제때 배워두지 않아서 스콧, 윌슨, 섀클턴은 손수 썰매를 끌며 북구의 탐험대들이라면 수월하게 갔을 여정을, 미련스럽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방법으로 주파하려한다. 추위와 배고픔, 질병에 시달리며 썰매를 끄는 탐험대의 행렬이라니, 그들이 살아돌아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스콧은 섀클턴이 자신의 부족한 리더십을 위협한다고 느껴지자, 노골적으로 모욕과 수치를 준다. 천식과 괴혈병으로(거기다 섀클턴은 심장에 이상이 있었다)으로 가장 위독한 상태에 이른 섀클턴을 썰매에 태우고 기지로 돌아와야 했던 스콧은 영국으로 귀환했을 때, 탐험의 실패를 섀클턴의 병으로 돌린다. 섀클턴은 분노와 수치에 치를 떨며 스콧보다 약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2차 탐험을 계획한다.

섀클턴의 2차 남극탐험은 국가적 원조가 아니라 개인적 탐험의 일환으로 추진되는데, 그의 인간적 매력에 빠져든 후원자들이 거금을 내는 형식보다는, 대출보증을 서주는 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탐험 이외의 모든 분야에서 실패와 빚더미에 허덕이는 그에게 남극을 정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명예와 부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콧은 섀클턴에게 자신의 1차 탐험 당시의 항로의 독점권을 주장하며 각서를 요구하기까지 하는데, 결국 이를 지키지 못한 섀클턴을, 스콧은 죽을 때까지 비방을 멈추지 않고 저주를 일삼는다. 

앤 페디먼과 같은 이들이 인간적인 매력이라고 해석하는, 영국탐험대들의 낭만주의적 성향, 즉 썰매개나 스키도 없이 실패한 선례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할 뿐인 그들의 행적에 대한 저자의 일갈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 이후에도 10여 년 동안 계속하여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음은 영국 극지방탐험의 역사에서 '영웅시대'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치장되었다. 하지만 많은 영웅주의가 그러하듯이 그것을 불필요한 낭비였고 무능함을 감추는 껍데기일 뿐, 한 마디로 말해 섀클턴 일행은 스스로 만사를 어렵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201p) 

섀클턴이 썰매개 대신 말을 이끌고 88도 23분까지 도달했던 기록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아문센을 비롯한 북구의 탐험가들은 섀클턴이 잘 조련된 썰매개와 장비를 구비했다면 분명 남극점을 정복하고도 남았을 거라고 극찬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스콧은 섀클턴의 실패를 거울삼지도 않은 채, 극지탐험에서는 무익할 뿐임이 증명된 말을 이끌고 결국 돌아오지 못할 극점을 향한 탐험을 하게 되는데, 스콧의 일기에는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설과 비방이 가득 적혀있기도 했다고 한다. 스콧의 <남극일지>는 대필 작가의 각색과 스콧 미망인의 편집을 통해, 지금 같은 형태로 출간되었다니, 역시 진실이 가진 힘은 때때로 고약하기 그지없다.  

20세기 초, 극지탐험에 관한 유럽 국가들의 각축은 냉전시대의 '우주전쟁', 달에 깃발을 꽂으려는 암투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새로운 항로와 정복자의 이름을 붙여 완성되어가는 극지도, 미지의 대륙에 대한 독점권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엘도라도였다. 무사 귀환한 탐험가들은 당국의 민관외교관으로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동원령에 이용되거나, 단교중인 국가와의 관계회복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각광받는 인사였다. 당시 극지탐험에 있어 독보적인 업적을 연일 갱신하는 노르웨이에 비해, 스러져가는 대영제국의 황혼을 유예시키기 위해서는 영웅의 존재가 절실했던 영국의 상황을 이해하면, 불멸의 영웅으로 거듭난 스콧의 사례는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남극을 통해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한 번도 감추려하지 않았던 섀클턴은, 기사작위와 세간의 명성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손을 대는 모든 일에 실패한 생활인 섀클턴, 아내 에밀리에게만 충실하지 못한 남편 섀클턴, 이제는 경쟁할 수도 없이 영웅으로 산화해버린 스콧을 뛰어넘으려는 탐험가 섀클턴, 그는 극을 꿈꾸고, 실행하고, 좌초하더라도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 무한 극한의 상황에서가 아니면 진가를 발휘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세 번째 탐험이자 섀클턴을 불세출의 리더로 인정받게 만든 인듀어런스 호의 남극횡단탐험의 장에 이르자, 아이러니하게도 저자는 남극탐험을 둘러싼 전혀 명예로울 것 없는 폭로와 추문으로 독자의 불편한 오감을 자극하던 것을 잊은 듯 보인다.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의 허장성세와 다를 바 없던 웨들 해를 항해한 후, 남극을 횡단, 로스 해를 통해 귀환하겠다는 섀클턴의 준비되지 않은 탐험에 무엇보다 할 말이 많아 보일 것 같은 저자가 기존의 전기 작가들과 다를 바 없이 섀클턴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찌 보면 무수한 섀클턴 관련저서들이 '인듀어런스'에 이르면 동어반복과도 같은 서술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아무런 불만 없이 수긍해버리고 마는 내가 있다. 약 2년에 걸친 인듀어런스 호의 28명의 대원들의 문명으로의 귀환은 정말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

섀클턴이 얼마나 역경의 상황에서 뛰어난 리더였는지에 대해 이견을 갖거나, 추앙을 보태고 싶지 않다.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목적의식도 없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퀘스트 호를 타고 떠났던 남극탐험에서 고질적인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하는 섀클턴.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로 귀환한 후, 유명세와 언론의 취재경쟁에서 벗어난 이후, 오히려 자신의 생의 목적을 잃고 좌초해버리고 마는 사례처럼, 섀클턴은 극지방에서의 극한의 도전 속에서만 초신성의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영웅시대'의 마지막 탐험가였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뿐이다. 남극을 꿈꾸고, 정복하려했지만 오히려 정복당한 것은 섀클턴 자신이었을지언정.

아마추어에 불과한 급조된 탐험대, 무지와 편견 탓에 영양실조와 괴혈병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던 식단, 선진적인 최신 장비와 기술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던 영국탐험대의 전통, 오로지 결과만이 상쇄시킬 수 있는 투명하지 못한 탐험을 둘러싼 이권다툼 속에서 어니스트 섀클턴이 그토록 분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본다. 준비 부족과 잘못된 계획으로 종종 대원들을 사지에 몰아넣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대장'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충분히 자각하고 책임지려한, 그리고 책임을 완수한 흔치 않은 인간이었다. 그의 불멸은 낭만주의 발로에서 비롯한 영웅시대의 조작된 위안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의 영역에서 완성된 위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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