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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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계속 내리막을 걷다 회한에 남기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고, 한 번도 정점에 서 본 적이 없어 늘 경계 밖에서만 존재하는 사소함일 수도 있고, 스스로 위선에 가득 찬 시스템을 벗어나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타협을 거부하는 일을 가리킬 수도 있고…… '바깥'을 비주류로, 경계의 밖으로, 사라져가는 모든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회의가 든다. 바깥이 있으려면 안이 존재해야하고, 기준으로 삼을만한 중심이 있어야하는데 과연 나는 어디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 이외의 것들을 재단하려하는 것인지 무섬증이 밀려든다. 안전지대에 머물며, 모호한 입지를 구축하며 살아온 회색분자에게 안팎의 경계를 서늘히 의식하게 만드는 책과 만났다.


한국일보의 기획기사 '최윤필기자의 바깥'의 꼭지들을 묶은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는 바깥의 정의를 국지적으로 논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경계의 경계警戒가 삼엄하지도 않은 사회, 안과 바깥이 평화롭게 바뀌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는 세상, 아예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마당을 우리는 바란다"(p.5)라는 서문이 너무 낙관적인 전망에 불과하다는 결단이 섣부른 것이었음을 인정하며 부끄러워졌으면 싶다. 스물여섯 꼭지의 사람, 사물, 공간, 시간의 이야기를 훑고 나면 회색분자에게도 자기선언의 색채가 부여되기를 바라며 그네들과 대면할 준비를 한다.

모든 것은 쇠락한다. 도리언 그레이처럼 영원한 젊음에 천착하다가 일시에 부메랑을 맞기보다는 순리대로 저물어가야 옳다. 젊음, 수명, 명예, 인기, 부, 왕국, 재능 등등. 그러나 전성기를 누리지 못한 채 너무 일찍 쇠락해버리는 것은 처연하다. 쇠락한 후 급격하게 잊혀지는 것, 망각했다는 것조차 망각해버리는 광속의 시간은 매몰차다. 실버극장을 표방한 극장 허리우드의 좁은 입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표상인 정통 사회주의자 이일재 옹, 승부의 세계를 뒤안길로 하고 번식마로 살아가야하는 다이와 아라지의 경우는 치열했던 분투만큼이나 적적한 심화로 남는다. 
 

바깥 중에서 바깥, 타지에서 유입된 이방인만큼이나 철저하게 바깥에 머물러야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셋넷학교의 그이들은 제도로의 편입에 처절한 곤란을 겪지만, 행복의 가치들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다. 미얀마 난민 조모아씨는 한국의 경우처럼 '버마'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동정이 깃들고, 은연중에 요구하는 저자세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싶어 그것이야말로 '인간극장'에 물든 시청자적 사고임을 재확인한다. "이 학교가 고맙고, 선생님이 고맙고, 무엇보다 애들이 고마워요. 탈북 청소년 교육? 통일? 그런 건 돈 타내려고 쓰는 프로젝트 계획서용 멘트죠. 솔직히 저는 통일에 별 관심이 없어요. 그냥 좋아서, 저 좋자고 하는 거예요."(p.139)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우스갯소리는 식상해졌을지 몰라도 실상은 절대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수영 국가대표 배준모 선수를 일평생 따라다닐 '박태환 선수 훈련파트너'라는 수식어는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만, 언론의 관심사는 이미 그 불편함에 할애할 지면이 없어 보인다. 스폰서의 지원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정상에 올라 기념촬영을 하는 것이 유명 산악인들의 관행이라면 변변한 스폰서도 없이 8000미터 급 14좌를 완등하고서 무명으로 남은 한완용 씨는 닐 암스트롱의 명성 뒤에 존재하는 버즈 올드린과 마이클 콜린스를 환기시킨다. 군무 발레리나, 얼굴 없는 손 모델,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동네영화를 찍는 영화감독, 공중파에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는 가수. 조명 받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가끔은, 아니 가끔씩만 기억나곤 하는 진실이다.


'딴단단단~ 따단~ 딴딴딴~'하는 시그널, 이금희 씨의 내래이션이 등장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나기란 좀처럼 쉽지가 않다. '바깥'의 무수한 존재들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접근해서 듣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정치적인 성향을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물여섯 꼭지의 사람, 사물, 공간, 시간의 사연을 무뚝뚝한 인터뷰와 흑백의 프레임으로 만나는 단도직입적인 지면들이 낯선 만큼이나 기억에 오래 남을 듯싶다. 물론 최윤필 기자의 바깥마당 또한 가공과 연출의 손길이 담뿍 묻어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어느 경계에 서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으며, 최대한 그네들을 재단하지 않고 바라보고 싶었던 애초의 심경이 어디까지 지켜졌는지도 알 수가 없다. 경계의 모호함과 무의미함이 분출해 지면에 담기지 않은 진짜 '바깥'이 파고가 안온한 중심을 흔들어놓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40원어치 폐지로만 남은 절판된 책들의 파쇄된 무덤을 떠올리며, 자연적인 수명의 사이클을 누릴 수 없는 모든 것들의 넋에 묵념하며 바깥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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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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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페디먼의『서재 결혼시키기』에 등장하는 현지독서의 다양한 예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특정한 책이, 작가가,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어느 장소에 대한 애착으로 귀결되는 여행의 개념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벅찬 감흥을 끌어안고『냉정과 열정사이』의 준세이와 아오이의 약속과 해후의 장소였던 피렌체의 두오모에 오르고 나서 볼 수 있는 것은, 피렌체 시가의 휘황한 풍광 대신 관광객들이 남긴, 심심치 않게 목격되는 한국어를 비롯한 각국의 언어로 된 유치한 낙서일 수도 있겠지만. 한 권의 책이 불러일으키는 여행의 좋은 예와 나쁜 예를 몸소 경험하려고 길을 나서는 이들은, 그 자체로 두어 완벽한 것의 실체, 환상을 제거하고 남게 되는 잔재를 마주하는 무모하고 열정적인 길 위의 돈 키호테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여행 또한 그렇다. "나는 여전히 어딘가를 여행하기 전에 그곳을 배경으로 한 책이나 영화로 예행 연습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것이 사랑에 빠지기 위한 구실이다. 사랑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려는 덧없는 몸부림이 아니던가. 그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다. 흐라발이나 카프카가 아니었다면 이만큼 프라하를 좋아하지 못했을 것이다."(p.50) 카프카가 종일 글을 썼던 프라하 성 아래의 황금소로 거리의 하숙집을 길을 잘 못 들어 보지도 못하고 왔을지라도, 돌발적이긴 하지만 희박하지 않게 겪게 되는 여행을 여행답게 만드는 진땀나는 일임에 틀림없다.

체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의 명소들을 거치는 윤미나와 여행메이트 비노 양의 여행담은 동유럽을 소개하는 여타의 여행서와 사뭇 다르다. 길 위에서 성찰하고, 역사의 상처 앞에 숙연해지고, 이방인에게도 너그러운 잊지 못할 인연들과의 아쉬운 이별 등등이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여행서의 매뉴얼에서 좋게 말하면 자유롭고, 돌려 말하지 않으면 불평과 뒤끝으로 가득하다. 무리지어 다니며 원치 않는 오지랖을 발산하는 미국인 관광객들에 대한 단호한 품평, 한밤중에 노크도 없이 속옷 차림의 투숙객에게 호통을 치는 주인의 형에 대한 원한, 잘못된 길안내를 하고서도 태연한 현지인에 대한 타박 등등. 길을 나선다고해서 모두가 구도자인 것은 아닌데도, 당연하게 감내하고 낮은 곳으로 임해야만 할 것 같은 인식은 어디서부터 만연한 것인지, 온갖 불합리에 주저 없이 눈을 흘길 수 있는 당당함이 외려 낯설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여행서라면 의례 그렇듯 빠지지 않는 것, 길 위의 사색만큼은 여느 책보다 풍성하고 할 수 있다. '번역하는 여자'는 '책 읽어주는 여자'이자 '영화로 세상 읽는 여자'이다. 이 여행자는 프라하와 두브로브니크, 블레드에 이방인의 인상 위에 촌철살인의 비평을 덧입혀 매너리즘 따위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한다. 흐라발과 카프카의 나라, 체코에 이어,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탐독은 그를 슬로베니아로 안내하고, 우리를 지젝에게로 인도한다. 기차 안에서 마주친 현지 대학의 법학도라는 여학생이 정작 지젝을 모른다며(자국의 대통령 선거 후보이기도 했던 세계적인 사상가인데도!) 섭섭해 하는 모습은 동류의식의 확인이 불발되자 새어나온 '지젝 읽는 여자'의 귀여운 한숨 같기도 하다.

사소한 불의에는 목청을 높이고, 거대한 불의에는 저주를 퍼부을 줄 아는 이 여자의 여행법이 심상치 않게 다가오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본의 아니게 겹겹이 위장한 채 살아가야하는 강박증을 지적받은 듯한 기분 때문일지도. "여행을 할 때는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솔직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행은 삶의 일부일 테지만, 분명 그 두 가지는 확연히 다르다. 여행 중에는 처지 곤란한 자아를 그런 대로 참아낼 수 있고, 때로는 즐기기까지 한다."(p.140) 사방팔방의 압박에 함몰되면서도 나다운 나를 연기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시작은 힘겨웠을지는 몰라도 여행을 마치고, 또 여행을 떠나기 위해 사는 것은 길에서 꺼내놓는 제 2의 인격을 발견하고, 비로소 인생과 화해하는 법을 체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서사는 불만의 향연이다. 묘사는 솔직함이 지나치고, 비유는 일상적이지 않다. 공감대를 나누고자 했다면 썩 성공적이지 못했을 거라고 슬그머니 예상하지만,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하듯 나만의 여행법을 하나쯤 가져야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라면 뭔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싶다. "공부 잘하는 법, 연애 잘하는 법은 있어도 여행 잘하는 법은 정의상 성립되지 않는다. 여행에서는 치사한 합리화도 허용된다. 그래서 가장 초라한 여행조차 눈부시게 찬란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p86) 두브로브니크의 정갈한 빨간 지붕 시가지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찬사를 얹는 대신 '죽음의 666' 계단에서의 모험담이 훨씬 인간적, 아니 '윤미나'적이다. 그래서 이 여행서는 보편 대신 개성의 영역에 자리잡는다.
 

E. M 포스터의 주인공들은 '베데커 여행안내서'를 지참하고 이탈리아나 인도, 그리스를 누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공식가이드북이었던 베데커 여행안내서를 팽개치고 길을 잃은 이들만이 위선적인 중산층의 질서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성당에서 멀리 떨어진 골목에서, 여행서에서 지정한 동굴이 아닌 초행길의 사원을 맨발로 밟는 그 순간. 『전망 좋은 방』이 특별한 이유는 피렌체의 풍광을 전망 좋은 방에서 내려다 보는 헬레나 본햄 카터의 고혹적인 옆 모습이 인상적인 포스터 때문이 아니라, 베데커 여행안내서를 불신한 루시 때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번역하는 여자가 여행을 떠나게 했던 책과 영화를 길 위에서 읽어주는 이 독서여행기는 판형이 참 재미있다. 길쭉하고 좁다라한 것이 여권이며 비행기티켓을 꽂아두는 여행안내서와 닮았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은 수건 하나면 충분하지만, 우리는 이 책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여행안내서와 궁국적으로는 여행안내서를 버릴 수 있는 길 떠난 이의 자기변혁이 필수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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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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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해체와 단절을 다룬 소설이 외려 식상하게 느껴지는 시절을 산다. 가부장적 전통과 희생적인 부모상을 그려내는 향수어린 회귀도 심심치 않게 목도한다. 가족이 점점 혈연을 나눈 타인으로,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극복할 수 없어 애증을 넘어 증오에 이르러 벌어지곤 하는 사건사고가 범람한다. 내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는 이들의 내면은 얼마나 바스러지기 쉬운 것일까 짐작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의 첫머리처럼,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
 

『너는 모른다』는 아이의 실종이 부른 어느 가족의 일상이 일거에 무너지면서 드러나는 총체적 붕괴의 맨얼굴을 서슴없이 보여준다. 봉인된 블랙박스를 여는 순간, 온갖 비밀과 추문, 위선과 위악, 악다구니와 체념으로 점철된 불편한 진실들이 넘쳐흐른다. 맨 밑바닥에 잠자고 있는 그것이 '희망'일 거라는 섣부른 기대 따위가 통용되는 현장이 아니란 것쯤은 이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가족광시곡이 연주되는 내내 확인할 수 있다. 화려한 수사와 미사여구가 존재하지 않는 단조로운 읊조림, 잔잔하기에 더욱 냉혹한 정이현의 문체는 어떤 전작보다도 서슬 퍼렇게 벼려져있다.
 

중국을 상대로 작은 무역업을 하지만 사업수완은 썩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김상호의 가정은 겉으로 보기에도 나쁘지만, 속은 차마 확인하기 두려울 정도로 곪아있다. 전처소생의 장녀는 늘 실패하는 연애를 되풀이하는 와중에도 '행복한 척'하는 아버지와 새엄마를 증오하느라 여념이 없고, 장남은 가족 내에 정물 같은 위치를 구축하고 여타의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타인의 애정과 관심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것이 오랜 연인의 것일수록 더더욱.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화교 커뮤니티 출신의 후처는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는 딸 유지를 돌보는 일 말고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경멸하면서도 애정을 갈구하고, 뒤늦게 관계를 회복해보려다가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는 이 가족이 완전하게 전복되는 것은 유지의 의문에 휩싸인 실종이다. 
 

열한 살 유지의 실종이 납치라고 믿으면서도 김상호는 실종신고하나 접수할 수가 없다. 다분히 미심쩍은, 경찰로 오인하는 것을 방치하는 탐정의 탐문수사에도 적극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가족들은 실종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신들의 허물을 덮는 것에 급급할 뿐이다. 불법장기 매매를 알선하는 브로커인 김상호, 같은 화교 출신의 오랜 내연남이 있는 진옥영, 친구들과 이복동생 유지를 유괴할 치기어린 계획은 세운 적이 있는 김은성, 누구보다 묵묵하게 자신을 숨겨왔지만 부정기적으로 방화를 저지르곤 했던 김혜성. 가족의 윤리는 유지의 실종보다 더 앞서 실종되고 말았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의 반사회적이고 부도덕한 과오 때문에 책임회피와 죄책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하다가 유지를 되찾아야한다는 일념으로 일시적인 봉합 상태를 맞는 가정의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타인들의 생명을 자본주의 논리 하에 매매하는 조건으로 유지의 행방을 통보받을 수 있는 김상호의 마지막 기회에서 보여지듯, '이 모든 게 가족을 위해서였어'라는 명분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유지를 찾는다고 해서 그네들의 양심과 가책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유지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절절한 진심을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가족임을 절감한다, 늘 그렇듯이 한참을 되돌아 너무도 뒤늦은 후에서야.
 

실패한 가정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늘 인간관계에 서툴고, 결정적인 순간에 인생에서 도피해버린다고 치부해버리기엔 인생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다고 항변하고 싶다. 불행한 가정에서 유년을 보낸 이들이 결국은 미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해 사회에서 낙오하고 만다는 도식은 하나의 유력한 가능성일 뿐, 절대적인 귀결일 리 없다. '제 각기 나름의 불행'을 내제한 가정에서 자라나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인생과의 분투를 멈추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 분투에 가장 커다란 힘을 실어줄 철저한 내 편들, 내 가족들을 애정으로, 애증으로, 애환으로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는 분명히 안다. 영원한 이방인인 각각의 인격이, 피를 나눈 타인들과 만들어가는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가족광시곡은 미완성이기에 의미심장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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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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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을 만족스럽게 마시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완고함이 있는 강인한 사내(p.93)”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갈이 뇌리에 박혀든다. 전국을 제압하고 이국의 천하마저 손에 넣고자 권세를 떨친 위정자에게 저만큼의 촌평을 듣는 다인(茶人) 센 리큐의 일대기를 이토록 그윽한 차향과 더불어 그려내는 농염한 팩션과의 조우에 요동치는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도요토미를 위시한 전란의 시기를 살았던 풍운의 인물들이 외려 더 친근하게 다가왔기에, 무사와 정객이 아니라 다도의 극한경지에 이른 다인을 전면으로 내세운 이 치밀한 소설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로마치 시대를 풍미한 ‘서원 다도’가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명품을 과시하기 위한 허영의 장이었다면 ‘와비 다도’는 내면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검소한 태도를 추구한다고 한다. 센 리큐는 전통적인 다도와 와비 다도를 모두 익힌 다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다풍을 확립한 다인이다.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지도와 세상을 바꾸는 것이 무사들이며, 살육의 시대에 구천을 떠도는 영혼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선사들이라면, 그 모든 이에게 공명정대하게 순간의 평안과 안식을 허하는 것은 다인의 영역일지도. 한 잔의 차를 마시는 행위에 격식을 쌓고, 세간을 읽고, 평판을 선도하면서도 모신 객들의 평정을 이끄는 와중에도 고아한 취향을 인정받아야하는 그 영역에 있어 리큐는 가히 신의 경지에 오른 이라 할 수 있다.

세속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 앞에서만 머리를 조아리(p.11)”고자하는 리큐의 고고함은 그를 우러르게 하는 동시에 깊은 적의를 쌓는다. 누구보다 가까이 그를 중용하면서도 자신의 취향을 천박하다 여기고 있는 리큐의 속내를 간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찮은 트집으로 리큐에게 자결을 명한다. 권세에 초탈한 미의 경지에 다다른 거장을 향한 질시는, 예술가를 거두어 후원하면서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권력자의 필연적인 컴플렉스일 수도 있다. 자신의 영역에서 수장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탐욕스럽고, 때로는 색스러운 열정에 몰두하는 서로를 간파한 채 혐오감에 치를 떨면서도, 호적수의 기량을 오롯이 인정하는 것은 그네들뿐인 싸움의 끝은 죽여도 죽지 않는 예술혼의 승리일지도. 


리큐의 죽음부터 역행하는 시간 속에서 도요토미와 그의 측근들이 차지하는 위상은 리큐가 추구한 궁극의 다도에 비한다면 일순간의 멸렬일 뿐이다. 비록 생사여탈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위정자일지라도 “영지나 금은을 갖고 싶어 하는 무사와 달리 리큐가 추구하는 것은 다도의 아름다움(p.264)”이기에 그것은 조화로운 싸움으로 볼 수는 없다. 천황의 우위에 서고자 도요토미가 조성했던 황금다실은 복원되어 오늘날의 오사카성에서도 위용을 확인할 수 있으나, 리큐가 집대성한 근세 다도의 고색창연함은 황금보다 더 휘황한 자취를 남기며 유유히 약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권력을 탐하는 것과 다도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의 알력다툼으로 『리큐에게 물어라』를 대하는 것이 그리 의미가 없는 것은, 우위를 점하기 위한 시간의 역행이 아니라 리큐가 추구한 아름다움의 태동이 어디에서 왔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고적함이 지나쳐 비웃음을 사기도 하는 겉치레뿐인 검약에서 풍기는 와비 다도의 고질적인 풍토에서 벗어나, 리큐의 다도가 갖는 풍만한 생기를 19세의 리큐가 경험한 조선 여인과의 필생의 인연으로 그리고 있는 설정은, 리큐의 다도뿐만 아니라 일견 살풍경해 보이는 형식미의 일본 다도의 본질을 생에 대한 철저한 긍정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차가 사람을 죽이기 때문"“다도에는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갖고 싶을 정도로 크나큰 아름다움”(p.287)이 있다는 선언은, 리큐의 다도를 덧없는 생임에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삶의 의지이자 불멸의 사랑으로 역설한다. 4첩 반, 2첩, 1첩 반. 리큐가 짓는 다실의 크기는 점점 협소해지고, 어슴푸레해져간다. 값비싼 당물이나 명물도구를 갖추어 그것을 품평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진실한 아름다움만 깃들게 하여 지복을 담아 한 차를 기울이고자 하는 리큐의 열망이, 여인이 남긴 향합에서 혼곤히 흐르는 백단향 마냥 전해져온다. 앉으면 무릎이 닿을 정도로 협소한 1첩 반의 다실에 리큐가 진실로 청하고 싶은 이는 사랑했던 고귀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무궁화 한 가지를 장식한 조막한 다실에서 마주한 채 차를 나누는 리큐과 조선 여인의 모습이 향기롭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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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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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그저 위선에 가득 찬 역할극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실은 그것이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판타지일까?"(p.141)  


평범한 사람들이 이상적인 가족상을 구현하며 알콩달콩 지내는 일은 드라마에서도 실현되기 힘든 판타지이다.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판타지'여서라기보다 비상업적인 코드이기에, 막장드라마의 오명을 벗겨주며 명품드라마로 추앙받을지언정 시청률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적확할 것이다. 방영 다음 날이면 '막장의 끝은 어디인가?'식의 성토 기사가 쏟아지는 것 또한 시청률만 보면 국민드라마라고도 치부할 수 있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고. 아침드라마, 일일극, 미니시리즈, 주말극의 재방, 삼방이 범람하는 드라마공화국에 사는 우리에게 막장가족은 클리셰의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다.
 

천명관은 클리셰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 치이고 치인 인간사에서 신화적인 모티브까지, 온갖 것들을 고루 버무려 압도적인 스토리의 향연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작가이다.『고래』에서 보여준 마르께스 뺨 치는 구변이 그랬고, 열한 토막의 종잡을 수 없는 단편들로 빼곡한『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그랬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기이한 운명 앞에 조롱당하며 벼랑 끝에 몰리는데도 쉴 새 없이 터지는 웃음의 코드를 삽입하는 솜씨는, 그를 격이 다른 허풍선이로 치켜세우는데 모자람이 없다. 그렇다면 천명관이 다루는 막장가족 이야기는 차고 넘치도록 전파를 장악한 막장가족 드라마와 어떤 차별성을 보여줄 것인지, 이쯤 되면 쉬이 수긍하는데 녹록치 않을 거라고 자부하는 독자의 기대치를 내세워 밀고 당기는 한판 승부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집을 떠난 지 이십여 년 만에 우리 삼남매는 후줄근한 중년이 되어 다시 엄마 곁으로 모여들었다. (중략)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만을 안고 돌아온 우리 삼남매를 엄마는 아무 조건 없이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다시 끼니를 챙겨주기 시작했다."(p.39)
 

칠순 노모의 스물네 평 낡은 아파트에 '평균나이 사십구 세'에 이르는 중년의 실패한 인생들이 모여 있는 꼬락서니를 떠올리니 과연 급이 다른 막장임을 인정해야할 듯하다. 이들 남매들에게 "휴, 어릴 때 고기 한번 제대로 못 먹이고 정부미만 먹였으니 애들이 부실해서……"(p.61)라며 삼시 세 끼를 고기반찬으로 차려내는 어머니의 심사 또한 섣불리 헤아려서는 안 될 위엄이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이 노령의 가족들은 독자가 기대하는 것처럼 서로를 증오하며 헐뜯는 악다구니를 보여주는 듯싶더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가족 간의 의리를 실현해낸다.   


가족들 앞에서 조카의 분홍 팬티를 쥐고 민망하다 못해 살의가 느껴지는 추태를 연출한 장남이 자학에 못 이겨 자살을 시도하지만 거구의 몸집 때문에 무의로 그치고, 가출한 십대 조카의 행방을 두고 울음바다가 연출되다가도 불시에 터지는 출생의 비밀들이 막장가족의 갈 때까지 간 궁상스러운 순간들에, 시트콤에 삽입된 웃는 BGM이 들려올 것만 같은 효과를 자아내며 도무지 긴장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뒤틀리고 희망이라곤 없는 관계임에도 조카를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둔 자존심마저 던져버릴 수 있는 몸부림 속에서 확인되는 가족의 굴레는 그네들에게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부여하기도 한다. 곁에 없으면 걱정하고, 미운 정의 정체는 애정이며, 혈육의 실패와 좌절은 내 것 마냥 뼈아프다. 그것이 바로 가족의 법칙이다.
 

"나에 대한 기대가 부서져 산산조각난 뒤에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 자신이 나를 포기한 뒤에도 그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p.253)

쉴 새 없이 '구라'를 삽입하고, 첩첩히 쌓이는 반전의 한 방, 두 방을 노리느라 숙연함 따위는 내던진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가족을 긍정하고,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결말은 짙게 드리운 암울한 인생의 패색마저 희석시킨다. 입봉한 영화로 '관객을 배신하고 제작자를 파산시키고' 결국은 에로영화를 찍는 곳까지 흘러든 '나'지만, 칠순 노모가 매끼 고기를 해먹이며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주지 않는 세상과 싸우라는 듯 다독여주었던 것처럼 삶에 몸을 실으려 하는 결심은 막장가족 이야기의 가장 큰 반전이다. 막장의 진수를 보여줄 것 같았던 작가의 능력에 배신(?) 당하고 말았지만, 그리 분하진 않다. 『고래』적 작가프로필의 삭발한 모습과 근래의 수북이 덮인 그의 머리칼을 번갈아보며, 근근한 시간 앞에 무뎌진 스토리텔링의 현장 확인보다는, 살아가는,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숙성된 인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역사이기 때문이다."(p.287)
  

나락까지 떨어진 '나'에게 쓰레기장에서 주운 헤밍웨이 전집과 주말의 명화에서 본 원작영화들은 여름 한 철 동안 노령의 가족들을 재구성하는데 일조한다. 물론 헤밍웨이조차 거대한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여전함을 담아서. 운이 다한 산티아고 노인이 잡았던 청새치를 떠올린다. 그 미끈하고 강렬하게 퍼덕이던 생명력을. 더 끈덕지게 사투한 노인의 당연한 전리품으로 당당히 귀항했어야 했을 그 청새치. 청새치보다는 끈덕졌지만 굶주린 상어 떼에게는 굴복해야했던 노인의 조각배 옆에 묶여있던 희뿌연한 거대한 뼈. '파더' 헤밍웨이는 결국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지만, 살아남은 자만이 청새치와 사투할 수 있다는 최후의, 또 최후의 운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일반론에 힘을 실어주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임을 안다. 막장극에 허락된 욕하면서 후련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와 지질할지언정 가족이기에 팔이 안으로 굽는 만고의 진리를 입증하며, 결국은 그네들도 평범한 가족의 일원임을 돌고 돌아 확인케 하는 천명관의 필력은, 클리셰의 향연 속에서도 쉬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딱 생의 무게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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