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그저 위선에 가득 찬 역할극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실은 그것이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판타지일까?"(p.141)  


평범한 사람들이 이상적인 가족상을 구현하며 알콩달콩 지내는 일은 드라마에서도 실현되기 힘든 판타지이다.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판타지'여서라기보다 비상업적인 코드이기에, 막장드라마의 오명을 벗겨주며 명품드라마로 추앙받을지언정 시청률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적확할 것이다. 방영 다음 날이면 '막장의 끝은 어디인가?'식의 성토 기사가 쏟아지는 것 또한 시청률만 보면 국민드라마라고도 치부할 수 있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고. 아침드라마, 일일극, 미니시리즈, 주말극의 재방, 삼방이 범람하는 드라마공화국에 사는 우리에게 막장가족은 클리셰의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다.
 

천명관은 클리셰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 치이고 치인 인간사에서 신화적인 모티브까지, 온갖 것들을 고루 버무려 압도적인 스토리의 향연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작가이다.『고래』에서 보여준 마르께스 뺨 치는 구변이 그랬고, 열한 토막의 종잡을 수 없는 단편들로 빼곡한『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그랬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기이한 운명 앞에 조롱당하며 벼랑 끝에 몰리는데도 쉴 새 없이 터지는 웃음의 코드를 삽입하는 솜씨는, 그를 격이 다른 허풍선이로 치켜세우는데 모자람이 없다. 그렇다면 천명관이 다루는 막장가족 이야기는 차고 넘치도록 전파를 장악한 막장가족 드라마와 어떤 차별성을 보여줄 것인지, 이쯤 되면 쉬이 수긍하는데 녹록치 않을 거라고 자부하는 독자의 기대치를 내세워 밀고 당기는 한판 승부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집을 떠난 지 이십여 년 만에 우리 삼남매는 후줄근한 중년이 되어 다시 엄마 곁으로 모여들었다. (중략)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만을 안고 돌아온 우리 삼남매를 엄마는 아무 조건 없이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다시 끼니를 챙겨주기 시작했다."(p.39)
 

칠순 노모의 스물네 평 낡은 아파트에 '평균나이 사십구 세'에 이르는 중년의 실패한 인생들이 모여 있는 꼬락서니를 떠올리니 과연 급이 다른 막장임을 인정해야할 듯하다. 이들 남매들에게 "휴, 어릴 때 고기 한번 제대로 못 먹이고 정부미만 먹였으니 애들이 부실해서……"(p.61)라며 삼시 세 끼를 고기반찬으로 차려내는 어머니의 심사 또한 섣불리 헤아려서는 안 될 위엄이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이 노령의 가족들은 독자가 기대하는 것처럼 서로를 증오하며 헐뜯는 악다구니를 보여주는 듯싶더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가족 간의 의리를 실현해낸다.   


가족들 앞에서 조카의 분홍 팬티를 쥐고 민망하다 못해 살의가 느껴지는 추태를 연출한 장남이 자학에 못 이겨 자살을 시도하지만 거구의 몸집 때문에 무의로 그치고, 가출한 십대 조카의 행방을 두고 울음바다가 연출되다가도 불시에 터지는 출생의 비밀들이 막장가족의 갈 때까지 간 궁상스러운 순간들에, 시트콤에 삽입된 웃는 BGM이 들려올 것만 같은 효과를 자아내며 도무지 긴장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뒤틀리고 희망이라곤 없는 관계임에도 조카를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둔 자존심마저 던져버릴 수 있는 몸부림 속에서 확인되는 가족의 굴레는 그네들에게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부여하기도 한다. 곁에 없으면 걱정하고, 미운 정의 정체는 애정이며, 혈육의 실패와 좌절은 내 것 마냥 뼈아프다. 그것이 바로 가족의 법칙이다.
 

"나에 대한 기대가 부서져 산산조각난 뒤에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 자신이 나를 포기한 뒤에도 그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p.253)

쉴 새 없이 '구라'를 삽입하고, 첩첩히 쌓이는 반전의 한 방, 두 방을 노리느라 숙연함 따위는 내던진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가족을 긍정하고,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결말은 짙게 드리운 암울한 인생의 패색마저 희석시킨다. 입봉한 영화로 '관객을 배신하고 제작자를 파산시키고' 결국은 에로영화를 찍는 곳까지 흘러든 '나'지만, 칠순 노모가 매끼 고기를 해먹이며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주지 않는 세상과 싸우라는 듯 다독여주었던 것처럼 삶에 몸을 실으려 하는 결심은 막장가족 이야기의 가장 큰 반전이다. 막장의 진수를 보여줄 것 같았던 작가의 능력에 배신(?) 당하고 말았지만, 그리 분하진 않다. 『고래』적 작가프로필의 삭발한 모습과 근래의 수북이 덮인 그의 머리칼을 번갈아보며, 근근한 시간 앞에 무뎌진 스토리텔링의 현장 확인보다는, 살아가는,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숙성된 인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역사이기 때문이다."(p.287)
  

나락까지 떨어진 '나'에게 쓰레기장에서 주운 헤밍웨이 전집과 주말의 명화에서 본 원작영화들은 여름 한 철 동안 노령의 가족들을 재구성하는데 일조한다. 물론 헤밍웨이조차 거대한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여전함을 담아서. 운이 다한 산티아고 노인이 잡았던 청새치를 떠올린다. 그 미끈하고 강렬하게 퍼덕이던 생명력을. 더 끈덕지게 사투한 노인의 당연한 전리품으로 당당히 귀항했어야 했을 그 청새치. 청새치보다는 끈덕졌지만 굶주린 상어 떼에게는 굴복해야했던 노인의 조각배 옆에 묶여있던 희뿌연한 거대한 뼈. '파더' 헤밍웨이는 결국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지만, 살아남은 자만이 청새치와 사투할 수 있다는 최후의, 또 최후의 운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일반론에 힘을 실어주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임을 안다. 막장극에 허락된 욕하면서 후련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와 지질할지언정 가족이기에 팔이 안으로 굽는 만고의 진리를 입증하며, 결국은 그네들도 평범한 가족의 일원임을 돌고 돌아 확인케 하는 천명관의 필력은, 클리셰의 향연 속에서도 쉬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딱 생의 무게만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