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을 만족스럽게 마시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완고함이 있는 강인한 사내(p.93)”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갈이 뇌리에 박혀든다. 전국을 제압하고 이국의 천하마저 손에 넣고자 권세를 떨친 위정자에게 저만큼의 촌평을 듣는 다인(茶人) 센 리큐의 일대기를 이토록 그윽한 차향과 더불어 그려내는 농염한 팩션과의 조우에 요동치는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도요토미를 위시한 전란의 시기를 살았던 풍운의 인물들이 외려 더 친근하게 다가왔기에, 무사와 정객이 아니라 다도의 극한경지에 이른 다인을 전면으로 내세운 이 치밀한 소설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로마치 시대를 풍미한 ‘서원 다도’가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명품을 과시하기 위한 허영의 장이었다면 ‘와비 다도’는 내면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검소한 태도를 추구한다고 한다. 센 리큐는 전통적인 다도와 와비 다도를 모두 익힌 다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다풍을 확립한 다인이다.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지도와 세상을 바꾸는 것이 무사들이며, 살육의 시대에 구천을 떠도는 영혼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선사들이라면, 그 모든 이에게 공명정대하게 순간의 평안과 안식을 허하는 것은 다인의 영역일지도. 한 잔의 차를 마시는 행위에 격식을 쌓고, 세간을 읽고, 평판을 선도하면서도 모신 객들의 평정을 이끄는 와중에도 고아한 취향을 인정받아야하는 그 영역에 있어 리큐는 가히 신의 경지에 오른 이라 할 수 있다.
세속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 앞에서만 머리를 조아리(p.11)”고자하는 리큐의 고고함은 그를 우러르게 하는 동시에 깊은 적의를 쌓는다. 누구보다 가까이 그를 중용하면서도 자신의 취향을 천박하다 여기고 있는 리큐의 속내를 간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찮은 트집으로 리큐에게 자결을 명한다. 권세에 초탈한 미의 경지에 다다른 거장을 향한 질시는, 예술가를 거두어 후원하면서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권력자의 필연적인 컴플렉스일 수도 있다. 자신의 영역에서 수장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탐욕스럽고, 때로는 색스러운 열정에 몰두하는 서로를 간파한 채 혐오감에 치를 떨면서도, 호적수의 기량을 오롯이 인정하는 것은 그네들뿐인 싸움의 끝은 죽여도 죽지 않는 예술혼의 승리일지도.
리큐의 죽음부터 역행하는 시간 속에서 도요토미와 그의 측근들이 차지하는 위상은 리큐가 추구한 궁극의 다도에 비한다면 일순간의 멸렬일 뿐이다. 비록 생사여탈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위정자일지라도 “영지나 금은을 갖고 싶어 하는 무사와 달리 리큐가 추구하는 것은 다도의 아름다움(p.264)”이기에 그것은 조화로운 싸움으로 볼 수는 없다. 천황의 우위에 서고자 도요토미가 조성했던 황금다실은 복원되어 오늘날의 오사카성에서도 위용을 확인할 수 있으나, 리큐가 집대성한 근세 다도의 고색창연함은 황금보다 더 휘황한 자취를 남기며 유유히 약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권력을 탐하는 것과 다도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의 알력다툼으로 『리큐에게 물어라』를 대하는 것이 그리 의미가 없는 것은, 우위를 점하기 위한 시간의 역행이 아니라 리큐가 추구한 아름다움의 태동이 어디에서 왔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고적함이 지나쳐 비웃음을 사기도 하는 겉치레뿐인 검약에서 풍기는 와비 다도의 고질적인 풍토에서 벗어나, 리큐의 다도가 갖는 풍만한 생기를 19세의 리큐가 경험한 조선 여인과의 필생의 인연으로 그리고 있는 설정은, 리큐의 다도뿐만 아니라 일견 살풍경해 보이는 형식미의 일본 다도의 본질을 생에 대한 철저한 긍정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차가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다도에는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갖고 싶을 정도로 크나큰 아름다움”(p.287)이 있다는 선언은, 리큐의 다도를 덧없는 생임에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삶의 의지이자 불멸의 사랑으로 역설한다. 4첩 반, 2첩, 1첩 반. 리큐가 짓는 다실의 크기는 점점 협소해지고, 어슴푸레해져간다. 값비싼 당물이나 명물도구를 갖추어 그것을 품평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진실한 아름다움만 깃들게 하여 지복을 담아 한 차를 기울이고자 하는 리큐의 열망이, 여인이 남긴 향합에서 혼곤히 흐르는 백단향 마냥 전해져온다. 앉으면 무릎이 닿을 정도로 협소한 1첩 반의 다실에 리큐가 진실로 청하고 싶은 이는 사랑했던 고귀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무궁화 한 가지를 장식한 조막한 다실에서 마주한 채 차를 나누는 리큐과 조선 여인의 모습이 향기롭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