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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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계속 내리막을 걷다 회한에 남기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고, 한 번도 정점에 서 본 적이 없어 늘 경계 밖에서만 존재하는 사소함일 수도 있고, 스스로 위선에 가득 찬 시스템을 벗어나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타협을 거부하는 일을 가리킬 수도 있고…… '바깥'을 비주류로, 경계의 밖으로, 사라져가는 모든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회의가 든다. 바깥이 있으려면 안이 존재해야하고, 기준으로 삼을만한 중심이 있어야하는데 과연 나는 어디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 이외의 것들을 재단하려하는 것인지 무섬증이 밀려든다. 안전지대에 머물며, 모호한 입지를 구축하며 살아온 회색분자에게 안팎의 경계를 서늘히 의식하게 만드는 책과 만났다.


한국일보의 기획기사 '최윤필기자의 바깥'의 꼭지들을 묶은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는 바깥의 정의를 국지적으로 논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경계의 경계警戒가 삼엄하지도 않은 사회, 안과 바깥이 평화롭게 바뀌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는 세상, 아예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마당을 우리는 바란다"(p.5)라는 서문이 너무 낙관적인 전망에 불과하다는 결단이 섣부른 것이었음을 인정하며 부끄러워졌으면 싶다. 스물여섯 꼭지의 사람, 사물, 공간, 시간의 이야기를 훑고 나면 회색분자에게도 자기선언의 색채가 부여되기를 바라며 그네들과 대면할 준비를 한다.

모든 것은 쇠락한다. 도리언 그레이처럼 영원한 젊음에 천착하다가 일시에 부메랑을 맞기보다는 순리대로 저물어가야 옳다. 젊음, 수명, 명예, 인기, 부, 왕국, 재능 등등. 그러나 전성기를 누리지 못한 채 너무 일찍 쇠락해버리는 것은 처연하다. 쇠락한 후 급격하게 잊혀지는 것, 망각했다는 것조차 망각해버리는 광속의 시간은 매몰차다. 실버극장을 표방한 극장 허리우드의 좁은 입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표상인 정통 사회주의자 이일재 옹, 승부의 세계를 뒤안길로 하고 번식마로 살아가야하는 다이와 아라지의 경우는 치열했던 분투만큼이나 적적한 심화로 남는다. 
 

바깥 중에서 바깥, 타지에서 유입된 이방인만큼이나 철저하게 바깥에 머물러야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셋넷학교의 그이들은 제도로의 편입에 처절한 곤란을 겪지만, 행복의 가치들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다. 미얀마 난민 조모아씨는 한국의 경우처럼 '버마'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동정이 깃들고, 은연중에 요구하는 저자세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싶어 그것이야말로 '인간극장'에 물든 시청자적 사고임을 재확인한다. "이 학교가 고맙고, 선생님이 고맙고, 무엇보다 애들이 고마워요. 탈북 청소년 교육? 통일? 그런 건 돈 타내려고 쓰는 프로젝트 계획서용 멘트죠. 솔직히 저는 통일에 별 관심이 없어요. 그냥 좋아서, 저 좋자고 하는 거예요."(p.139)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우스갯소리는 식상해졌을지 몰라도 실상은 절대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수영 국가대표 배준모 선수를 일평생 따라다닐 '박태환 선수 훈련파트너'라는 수식어는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만, 언론의 관심사는 이미 그 불편함에 할애할 지면이 없어 보인다. 스폰서의 지원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정상에 올라 기념촬영을 하는 것이 유명 산악인들의 관행이라면 변변한 스폰서도 없이 8000미터 급 14좌를 완등하고서 무명으로 남은 한완용 씨는 닐 암스트롱의 명성 뒤에 존재하는 버즈 올드린과 마이클 콜린스를 환기시킨다. 군무 발레리나, 얼굴 없는 손 모델,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동네영화를 찍는 영화감독, 공중파에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는 가수. 조명 받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가끔은, 아니 가끔씩만 기억나곤 하는 진실이다.


'딴단단단~ 따단~ 딴딴딴~'하는 시그널, 이금희 씨의 내래이션이 등장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나기란 좀처럼 쉽지가 않다. '바깥'의 무수한 존재들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접근해서 듣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정치적인 성향을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물여섯 꼭지의 사람, 사물, 공간, 시간의 사연을 무뚝뚝한 인터뷰와 흑백의 프레임으로 만나는 단도직입적인 지면들이 낯선 만큼이나 기억에 오래 남을 듯싶다. 물론 최윤필 기자의 바깥마당 또한 가공과 연출의 손길이 담뿍 묻어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어느 경계에 서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으며, 최대한 그네들을 재단하지 않고 바라보고 싶었던 애초의 심경이 어디까지 지켜졌는지도 알 수가 없다. 경계의 모호함과 무의미함이 분출해 지면에 담기지 않은 진짜 '바깥'이 파고가 안온한 중심을 흔들어놓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40원어치 폐지로만 남은 절판된 책들의 파쇄된 무덤을 떠올리며, 자연적인 수명의 사이클을 누릴 수 없는 모든 것들의 넋에 묵념하며 바깥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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