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제국
이토 게이카쿠.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프랑켄슈타인의 후예들

 

이 작품은 일본 SF계의 놀라운 신예로 주목을 받았으나 2009년 3월 34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요절한 이토 게이카쿠가 남긴 미완의 원고를 문학적 맹우인 엔조 도가 이어서 완성한 작품이다. 프롤로그 부분은 이토 게이카쿠가 집필하고 그 다음은 엔조 도가 이어서 집필하였다. 특히, 이토 게이카쿠가 남긴 플롯에는 결론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엔조 도는 이토가 생전에 쓰고자 했던 거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고 한다. 또한, 서로 다른 작품 또한 문제이기는 했다. 엔조 도는 이토 게이카쿠의 작풍을 존중하면서 집필하였고 그것은 총 3년 4개월이 걸렸다.

 

이처럼 <죽은 자의 제국>은 완성된 스토리 자체가 제법 흥미롭다. 이토 게이카쿠는 이 소설의 프롤로그를 적고 난 후에 안타깝게 죽었다고 한다. 그 후의 소설을 이토 게이카쿠의 문우인 엔조 도가 적었다고 하니,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된 것이 안타까우면도 문우의 우정이 부럽게 느껴졌다. 특히, 젊은 나이에 마음의 친구를 잃고 그를 위한 책을 완성했다고 하니,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엔조 도에게는 이 책이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엔조 도가 이 책을 쓰는 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기대가 되었다.

 

책의 스토리 또한 제법 흥미로웠다. 이 책의 이야기는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붐베이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일본 등으로 공간적 배경이 옮겨지고 있었다. 장대한 스케일이 책의 두께만큼이나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죽은 자에게 가짜 영혼을 주입해서 다시 살려낸다는 이야기는 로봇이 인류를 말살한다는 스토리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인간에게서 아찔한 도발이 느껴졌다.

 

신에게 닿기 위해 높은 바벨탑을 쌓다가 신에게 서로의 말이 달라지는 벌을 받게 된 인류가 또 다시 과한 욕망에 사로잡혀 끝없는 나락으로 빠지게 되는 파멸을 겪게 될 것 같았다.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발명한 로봇이 인류를 위협하는 것처럼 죽은 자들도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의 탐욕과 그 좌절, 그로 인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은 죽은 자들이 사고하는 힘을 갖게 되어 자신들의 제국을 구축한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이 책은 모든 죽은 자들을 부활시켜서 죽은 자들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더 원의 음모를 밝혀내고 저지하는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죽은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하나님에 의한 심판을 피조물일 뿐인 인간이 저지르려고 했던 탐욕으로 인한 어리석은 행위였다.

 

19세기 말은 실제 역사로는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난 후이고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으로서 혼란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크리처를 창조하고 난 후 1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 기술은 결국 전 세계에 확산되어 시체에서 되살려 낸 '죽은 자'들을 노동용에서 군사용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허구적인 요소를 SF 소설이라는 것을 염두해 두면서도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었다. 죽은 자에 가짜 영혼을 주입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어떤 화학적인 요법과 전기 요법만으로도 가능하냐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떤 화학적인 요법이라고 해도 몸이 썩어 들어가는 죽은 자만의 냄새를 어떻게 지울 수 있고 막을 수 있냐는 거였다. '가짜 영혼'이 주입되어 몸에 피가 흐르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죽은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죽은 자의 시체를 함부로 이용하는 것을 인간의 존엄성 차원에서 인류가 막지 않고 있다는 점도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을 읽어도 이런한 의문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산 자에게 이러한 시술을 사용하여 가짜 영혼을 덮어쓰기 할 수 있다는 점을 불법으로 규정하거나 시체 폭발이 일어나도록 하는 점만을 문제로 삼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도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또한, 이 책에서 가짜 영혼이 주입된 '죽은 자'공포물의 대명사인 좀비, 그리고 로봇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았다. 본인의 의지가 없다는 점은 공통적인 성격이었다. 단지 '죽은 자'는 좀비와는 다르게 인간 다수에 대한 공격성은 없었다. '죽은 자'는 로봇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쓰임새를 가진 편리한 존재였다. '죽은 자'는 로봇보다는 인간적이었고 필요할 때는 전쟁터에서 전쟁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죽은 자'는 로봇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아직까지도 미래의 공상과학 영화에서처럼 만능의 로봇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은 자'에 가짜 영혼을 인스톨하는 것은 조금 더 쉬운 방법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로봇이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미래 모습은 쉽게 상상이 가지만 '죽은 자'에 가짜 영혼을 주입시킨다는 설정은 아무리 해도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내용이라서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산 자에게 죽은 자의 가짜 영혼을 주입시키게 되면 영혼끼리 충돌을 겪으며 혼란을 느낄 것 같은데, 책 속에서는 생명을 연장 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술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로봇에 가짜 영혼을 주입한다고 하면 조금 더 친숙하게 느껴질 것 같은 걸 보면, 내가 이 책의 SF적인 요소를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상상력 부족인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19세기 말, 아주 먼 옛날에 프랑켄슈타인의 후손들이 인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허구적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죽은 자의 제국을 만들려고 하는 더 원의 발자취를 쫓는 왓슨이라는 주인공 무리들은 사건의 핵심에 다가서기 위해 사건의 단서들을 기반으로 진실을 추적한다는 기본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죽은 자의 신체에 가짜 영혼을 주입시켜서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운다는 상상력이었다. 단지, 인간의 과도한 탐욕과 욕망의 좌절,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고민의 흔적을 많이 접할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 알라딘 민음사의 서평단으로서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나의 얼굴을 쓰다듬는 고향의 바람, 이 바람의 감각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것은 내 안의 누군가가, 미세한 존재의 집단이,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의 작용이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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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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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와 추리가 결합한 지적 미스터리

 

노리즈키 린타로,,, 추리소설 작가로 유명한다고 하지만 그의 작품을 많이 접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은이에 대한 설명에서 추리소설의 존재 의의나 밀실 구성의 필연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고뇌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이러한 고뇌하는 작가로서의 특성은 이 소설에서도 충분히 반영되고 있다. 특히, 웜홀과 블랙홀, 자기장, 시간 여행, 텍스트의 미래와 관련한 SF적인 요소를 추리소설과 결합한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여기에 나오는 추리소설을 모두 읽어보고 싶은 욕구에 시달려야 했다.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 등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을 몇 권 읽었고 추리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 책에 나오는 것 만큼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리소설에 대한 상당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 사건이나 엘러리 퀸의 이야기는 대체로 알고 있었지만 모든 작품을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아서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4편의 단편은 대체로 연관되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첫번째 소설과 마지막 편의 단편 소설은 서로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블랙홀과 웜홀, 시간 여행이라는 과학적인 지식과 문학수리해석이라는 오토포에틱스 문학으로 대변되는 자동적으로 창작되는 시스템의 문제는 언젠가 미래 사회에 나타날 수 있는 타당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스 머신>은 녹스가 쓴 탐정 소설의 십계명 중에서 제5항인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라는 문제 있는 발언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을까,,, 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편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에서 온 사람으로 인해서 과거의 사건이 바뀌는 내용은 흔할 수 있지만, 여기서 특이한 논리는 실제의 시간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우주의 평행 이론에 의해서 현재에서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갈 경우에 그 과거가 A와 B라는 두 개의 갈림길로 나뉘어서 미래로 진행되어서 그 순간 과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가 될 수 없다는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녹스가 쓴 '중국인의 등장'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 하지만 왜 그런 불합리한 논리가 나오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다양한 상상력을 펼치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단편이라고 할 수 있었던 <들러리 클럽의 음모>는 추리소설에서 탐정의 곁을 지키는 보조자들의 인물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권리와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여기에서 상당히 많은 보조자들이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등장했던 소설을 모두 알고 있는 게 아니라서 안타까웠다. 만약 그들이 등장하는 모든 추리소설을 알고 역할을 더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면 캐릭터의 성격을 이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부분과 연관해서 재미있는 요소를 더 많이 발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편 소설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삶 중에서 가장 미스터리하게 남아있는 11일간의 실종 사건을 다루고 있다. 탐정과 조수가 등장하는 추리소설의 틀을 바꾸지 않도록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한 일이었다는 설명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소설 속의 등장 인물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창조한 작가에게 대항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깊었던 것이다.

 

그만큼 지적인 유희를 느끼며 재미있었던 반면에 결말을 조금 흐지부지한 측면이 있었다. 그것을 알고 그 뒤에 엮은이의 설명이 있었는데, 애거서 크리스티가 이 단편 소설을 적은 것으로 그녀의 사후에 발견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와 등장인물 간의 실제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다수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반가웠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즉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을 읽었던 당시의 충격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 책을 처음부터 세세하게 다시 읽고 싶어졌다.

 

<바벨의 감옥>은 일본어로 쓰여있지 않아서 그런지 세로쓰기에 맞춘 트릭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두 개의 인격이 서로 격리되어 있고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결국 마침표의 출구를 찾는다는 것인데, 상당히 난해한 편이었다. 거울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쓰여진 이상의 시가 많이 생각났다. 띄어쓰기가 없이 쓰여진 난해한 시들,,, 해석할 여지는 많았지만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연구자들의 도전 의식을 불태우게 만드는 이상이 1930년대 인물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논리증발-녹스 머신2>는 <녹스 머신>에서의 주인공인 유안 친루가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였다. 여기서는 엘러리 퀸의 <샴쌍둥이 미스터리>에서 '독자의 도전' 부분이 왜 없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전자 장치에 저장된 텍스트가 불타오르는데, 유안 친루가 '찢어진 눈의 중국인'으로서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독자의 도전'을 통해 텍스트의 불확정성을 높여 불을 진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이 소설은 상당히 많은 과학적 지식과 논리가 적용되고 있어서 말로 해서는 그냥 말도 안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전자 매체의 텍스트가 불에 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미래의 어느 사회에서는 그런 논리가 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의 상상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러한 과학적인 논리가 쉽게 이해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독자평에도 '당신들이 이해할 수 있겠나?'라는 문구가 올라오는 게 아니겠는가? 어쨌든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그에 대한 배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흥미롭게 읽어볼 만한 소설이었다.

 

 

* 알라딘 반니의 서평단으로서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그저 황당무계한 SF라 해도 `어디까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을지`보다도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어떻게 주워 담을지`에 생각을 맞추는 것은 아무래도 미스터리 작가의 천성일 것이다. 장르의 초월이나 하이브리드,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기묘함까지 포함해 독자가 즐겨준다면 더 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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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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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재난 속에서의 성장기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구의 자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환경 오염인 건지 아니면 태양계의 어떤 영향인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면서 하루가 24시간의 틀이 깨어지게 되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지구의 환경을 인간은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이러한 물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책이었다. 책에서는 이렇게 지구의 자전이 느려지는 현상을 어느 순간부터 '슬로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면서 지구에 찾아온 변화를 살펴보자. 그 변화는 제일 먼저 우리의 일상 생활에 시간의 어긋남이 찾아왔다. 하루의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아침이 조금씩 늦어지게 되었다. 아침인데도 여전히 세상은 어두웠다. 밤에 자야할 시간인데도 해가 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지낼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해가 뜨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즉,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는 것과 상관없이 전에 생활했던 24시간 체제인 '클락타임'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도 지구 환경의 일부 체계일 뿐이기 때문에 지구 자전 속도에 맞게 생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리얼타임'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구에서는 두 개의 시간 타임이 공존하게 되었다. 현실 세계와 공상 세계 처럼 두 세계는 공존하기가 어려웠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계속 느려져서 24시간 체제를 유지하는 클락타임과 리얼타임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얼타임은 은행이나 관공서, 마트 등을 잘 이용할 수 없어서 생활의 불편을 느끼면서 무정부주의자처럼 되어갔다. 클락타임의 사람들도 리얼타임의 사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리얼타임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끼리 도시를 벗어난 곳에서 하나의 집단을 이뤄서 살아나가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는 리얼타임의 하루가 너무나 길어져서 인간이 그에 맞춰 생활할 수 없는 지경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지구의 자전 속도는 하루 24시간에서 점차 느려져서 하루 48시간으로 2배나 늘어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에 닥친 재난은 태양의 일조량이 더 많은 시간 지구에 비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생채리듬은 낮에는 활동을 하고 해가 진 밤에는 잠을 자며 원기를 회복하는 시간이 깨지게 되었다. 해가 쨍쨍 내려쬐는 데도 한밤중이라며 잠을 자야 했고 해가 없는 추운 한밤중에도 정오라며 사회 활동을 해야 했다. 이러다가 더 큰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너무 많은 시간 동안 해가 내려쬐느라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인공적으로 햇빛의 양을 조절하느라 전지구적으로 식량이 점차 부족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먹는 야채와 과일들을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구의 재난으로 인해서 재난을 대비한 식품이 동이 나고 여러 물품들이 부족하게 되었다. 더 가난한 나라에 구조의 손길을 보내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슬로잉 현상이 일어나면서 지구의 자장에 영향을 주었고 엄청난 새들과 고래 등의 동물들이 갑자기 죽기 시작했다. 지구에 종말이 닥칠 징조로 여긴 사람들은 자살을 하거나 두려움에 떨면서 식품들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햇빛으로 나무가 말라죽기 시작하면서 지구의 모습은 변해 나가고 있었다. 슬로잉 현상은 점차 지구의 자기장에 영향을 줘서 결국 하늘에서 셀로판이 구겨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린 이후에 지구의 자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태양의 방사선으로부터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주던 보호막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유전자에 변이를 일으키는 방사선으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햇빛 아래에서 생활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동식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먹을 음식도 오로지 인공적인 햇빛에만 의지할 수박에 없었다.

 

이런 지구의 재난 속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서든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지구의 중력이 더 강력해져서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전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하게 되었다. 운동선수가 차야하는 축구공이나 야구공 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하 시설에 재난 식품을 마련해 두고 창문에 두꺼운 철문을 대며 일상생활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지구에 속하는 생명체로서 그러한 지구적 변화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것을 '슬로잉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병으로서, 두통이나 어지럼증, 무기력증, 실신 등 몸이 허약해지는 것으로 딱히 치료 방법이 없었다.

 

특히, 이 책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줄리아는 이제 막 청소년기에 접어든 열한 살 소녀였다. 줄리아는 지구적인 변화 속에서도 몸의 늦은 2차 성장에 몰래 속옷을 사기도 하고 학교에서 잘생긴 세스라는 소년을 짝사랑하며 신경을 쓰기도 하고 여자 친구가 없어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움을 겪는 사춘기 소녀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멀어진 것에 대해 서운하면서도 자존심때문에 별 말을 못하기도 하고 인기있는 여자애들을 부러워 하기도 하는 평범한 아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에서 점차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도기에 접어든 줄리아와 같은 시기의 아이들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기적의 세기'에 해당하는 건지도 몰랐다.

 

이 소설은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간은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라는 재미있는 발상을 가지고 쓰인 책이다. 그래서 그러한 지구의 재난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흥미로웠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지구의 재난이 언젠가는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지구의 환경 변화가 여러 재난 영화나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지구의 종말을 언젠가는 일으킬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이러한 지구의 재난 속에서도 어쨌든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든 어떻게든 적응해 나갈지 모른다는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슬로잉 현상은 멈추지 않고 몇 년 후에도 계속 하루의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지구의 재난 속에서도 사춘기를 겪어내는 줄리아, 즉, 다음 세대의 모습이 그만큼 눈부신 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알라딘 민음사의 서평단으로서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슬로잉이 시작되고 일 년이 지났을 즈음 어두컴컴한 여름날 오후에 두 아이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윽고 두 아이는 젖은 시멘트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지극히 단순한 진실, 그러니까 이름과 날짜 그리고 이 글을 새겼다. 우리는 이곳에 있었다.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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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 - 아빠와 함께 천문학 여행
울리히 뵐크 지음, 전대호 옮김 / 봄나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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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을 자극하는 추억 여행 

중학교 때였다. 겨울 방학 때 밤늦게 불을 끄고 자려고 하는데, 라디오에서 그 날 밤이 우리나라에서 월식이 일어나는 날이라고 마지막 멘트를 날렸다.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옷을 껴입었다. 그리고 바라본 하늘에서 조금씩 월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그 선명한 보름달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알지 못 하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들이 참 많았다. 그 중의 하나는 하늘의 별자리였다. 그 당시 겨울 별자리로 유명한 오리온자리와 카시오페아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런 별자리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서 그 후에야 우리나라 겨울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별자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계절보다는 겨울철에 더 별자리가 잘 보여서 관찰하기 쉬운 환경이라는 거, 월식은 일식과는 다르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 월식이라고 해서 일식처럼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거, 등등 정말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다. 

그리고 더 어렸을 때 섬으로 수련회를 간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지막 날 캠프파이어를 하는데, 지상에 있는 모든 불을 한꺼번에 껐다. 촛불을 들고 있었지만 하늘에 빼곡히 박힌 별들에 의해 불빛이 꺼져버릴 정도였다. 정말 하늘에서 별이 쏟아진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지상의 불빛이 하늘의 별들을 이렇게 가려버리고 있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그런 하늘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꺼진 곳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추억은 세월이 지나갈수록 선명해지며 내 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 추억은 자꾸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내게 불러 일으켰다. 천체 망원경을 사려고 그 관련 서적들을 찾아 읽어보고 우리나라 별자리를 소개해 주는 책, 천문대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책들을 사서 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쉬움은 커져갔다. 현실적으로 천체 관찰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런 때에 만난 이 책은 표지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별이 빛나는 밤'에 읽으며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었다. 천문학자인 아버지가 자신의 어린 딸에게 우주의 신비를 전해준다는 내용의 이 책은 내게 밤하늘에 대한 향수를 다시 한 번 불러일으켰다. 어렸을 때부터 밤하늘과 친해질 수 있었던 환경을 가진 그 어린 딸이 무척 부러울 정도였다. 

이 책에서는 일반적인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갈등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슈텔라가 친구와 함께 '자기 별'을 찾는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정체모를 쪽지가 나타난다는 정도의 사건이 일어날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복잡하고 자극적인 현대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성인들의 마음을 위로해줄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뜻하고 풋풋한 내용들이지만 우주의 기원과 탄생, 미래에 대해 얘기하는 철학서이기도 한 책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 걸까?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누구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우주의 신비에 놀랄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 우주는 이토록 조화롭고 완벽할 수 있을까? 하는 경탄스러움 말이다. 

누구나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 되고 싶어 한다. 세상에 존재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하는 아동과 청소년기에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성장 소설이라기보다는 천문학에 대한 쉬운 입문서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싶지만 말이다. 요새 '동심'이 훼손되어 사라져버린 현대 사회에서 순수하고 엉뚱한 동심들의 재미있는 질문이나 궁금증들이 풋풋해서 즐거워졌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나 어른스럽고 어른의 사고방식을 닮아 돈과 외모를 중시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더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그리워졌다. 그래서 이 책에서 천문학자인 아버지가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지켜주자며 그들이 '꿈꾸고 상상하는 권리'를 뺐지 말자고 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별이 빛나는 밤'에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간절히 빌어본다.   

 

+'봄나무' 출판사로부터 해당 리뷰 도서를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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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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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신념을 위한 멋

이 책은 조선의 문장가인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이다. 이옥과 김려는 정조 시대의 인물이다. 조선 역사에서 정조 시대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이 많다. 정조는 세종대왕만큼 똑똑한 왕이었지만 시대를 제대로 만나지 못 해 자신의 꿈과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독살 당한 비운의 왕이다. 아버지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이고 세도가들의 세력이 커져 자신의 세자 자리도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조선 후기의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나름대로 이상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정조의 시대는 많은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최근에 드라마화 되어 인기를 끈 <성균관 스캔들>이 정조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사도세자의 초상화가 소재로 등장한 <바람의 화원>, 정조의 죽음을 다룬 <정조암살미스테리 8일>, 정조의 비밀스런 편지를 보여주는 <정조의 비밀편지> 등이 있었고 드라마도 정조를 주인공으로 한 <이산>이 있었다. 이 외에도 정조를 소재로 삼은 것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사회가 급변하는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사상이나 소설이라는 허구의 문학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실학 사상가들도 문학의 재미에 눈을 뜨고 박지원은 한문으로 된 소설을 직접 짓는 등 많은 학자들이 그 분위기에 휩쓸러 갔다. 하지만 정조는 소설 등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배척하려는 '문체반정'을 일으킨다. 어찌 보면 문체반정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만큼 사회의 변화를 뒤처지게 만든 규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도 그러한 압제에 몸부림을 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이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이옥보다는 많은 한문 소설을 써서 양반을 비판한 박지원이 더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박지원은 소설 속에서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소설적 장치를 썼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옥과 비교해 보면 이유가 궁금해질 정도다. 그것이 바로 집안의 세력 때문이었다. 함께 문학에 탐닉했더라도 세도가의 집안이라면 별다른 벌을 내리지 못했다. 이옥은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본보기였을 뿐이다. 그래서 이옥은 결국 과거를 보지 못하고 가난한 삶을 겨우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옥은 문체를 바꾸지 못한 걸까, 아니면 바꾸지 않은 걸까?  

이 소설은 현감이 된 김려를 이옥의 아들인 우태가 찾아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김려는 풍요로운 생활에 젖어 옛날에 유배를 떠나며 겪었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우태로 인해 이옥과의 관계와 힘든 유배 생활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고초를 겪으며 의식적으로 멀어졌던 이옥의 글을 다시 읽게 되고 '진정한 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글을 읽으며 이옥과의 추억을 되새기다 그와의 우정을 깨우치며 친구를 외면했던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김려는 아버지인 이옥의 글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고 우태를 나무라지만 우태는 이옥보다 현실의 삶을 더욱 높은 차원에서 그려내고 있어서 김려는 놀라고 만다. 김려는 우태를 오해했음을 미안해한다. 그리고 유배의 길 위에서 탄생한 자신의 글을 되찾는 여정을 떠나려 한다.  

이 책은 이옥과 김려의 글들을 많이 싣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하지만 소설적인 재미는 그만큼 반감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 이옥의 아들이 찾아온 장면이 흥미로워서 그 다음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대감이 생겼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옥과 김려의 글과 김려의 귀양길이 한참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것도 짧은 만남과 대화가 있을 뿐이어서 아쉬웠다. 이옥과 김려의 글도 재미있었지만 다른 소설적인 요소도 더 있었다면 읽는 재미가 많아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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