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을 두시간이나 잤다. 그래도 비몽사몽이다. 어제 못잔 탓이다. 어제까지 전달해 주기로 한 시험문제가 있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바람에 좀 무리했다. 새벽 두시가 되어서야 시험문제를 담은 파일을 메일로 보낼 수 있었다.
너무 티를 내서 좀 그렇지만, 요즘 일이 밀려서 마음이 초조하다. 그래서 선언한 것이 “앞으로 술약속이 없는 날은 무조건 연구실에서 잔다”였다. 대단한 결심 같지만 그게 꼭 그렇지도 않다. 일단 이번 주를 보면 월요일과 화요일을 빼면 일요일까지 죄다 약속이 있다. 어제 밤을 샜으니 오늘은 집에 가야 할 터, 실제로 천안서 잔 날은 어제가 유일할 것 같다. 다음 주는 뭐 얼마나 다를까?
79번째: 의자에서 자다
일시: 7월 19일(수)
마신 양: 진짜 많이
테니스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컨디션이 좋아 술이 입에 쩍쩍 붙는 느낌, 그래서 남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부어라 마셔라 했더니 집에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없다.
나: 어제 혹시 별일 없었니?
친구: 중간에 잤잖아! 너 데려다 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랬구나. 요즘 술버릇이 좋아졌다 했더니 결국 옛날 버릇이 도졌다. 친구들이 안데려다 줬으면 어땠을까? 귀소본능 때문에 집에는 갔겠지만, 휴대폰 두개 중 최소한 하나, 그리고 지갑을 잃어버린 채 길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지 않았을까?
내가 아는 어떤 여자분은 술을 아무리 먹어도 정신을 잃지 않지만, 일단 집에 오면 그대로 쓰러져 잔단다. 험한 사회이니 그녀 정도의 미녀라면 긴장하는 건 당연하다. 바꿔 말하면 내가 쓰러져 자는 건 그런다 해도 별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내 귀소본능을 믿기 때문에, 아니면 친구들이 알아서 해주겠거니 생각하기 때문일 듯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많이 마시진 말자. 술 먹고 뻗는 건 젊을 때의 객기일 뿐, 지금 그러기엔 내가 너무 나이가 많으니 말이다.
80번째: 중간에 도망치다
일시: 7월 22일(토)
마신 양: 내 한계 플러스 두잔 더
강원도로 진료를 가 있는 우리 써클에 선배들이 가는 날. 후배들이 마련해 준 버스를 타고 후배들이 만들어 준 안주로 후배들이 사놓은 술을 마시며 우의를 다지는 시간이다. 정말 진료를 하러 가는 훌륭한 선배도 있는 반면, 나처럼 하루 잘 놀아보자고 가는 선배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같은 선배들 십여명과 한창 때라 밤을 샌다 해도 다음날 일하는 데 지장이 없는 팔팔한 후배들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어느덧 시간을 보니 새벽 네시, 후배들은 계속 “마태우스 선배님!” 하면서 술을 권한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겠다 싶어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숙소로 도망갔다. 물론 그 시간에도 여전히 돌부처처럼 앉아 있는 많은 선배가 있었다지만, 주량 약한 난 이쯤해서 퇴장해 줘야지.
다음날 11시 쯤 잠에서 깨어 생각을 했다. 도망 나오기 정말 잘했다고. 친구랑 마실 때와 달리 난 거기서 취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그런 긴장이 나로 하여금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만든 것이리라.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 술대결을 할 때 졸면 그대로 굴러 떨어지는 낭떠러지에 있다고 생각하고 술을 마신다면 지금처럼 승률 17%의 초라한 성적표는 안받아도 되지 않을까. 이날의 여파 때문인지 오늘 아침 사우나에 가서 체중을 쟀더니 수치가 위험 수위에 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