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16강전이 시작된 첫날, 난 밤 열시부터 두시간 가량을 잔 뒤 월드컵에 임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시간은 좀 적었다. 최소한 밤 8시부터는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독일과 스웨덴의 경기는 팽팽하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독일의 일방적인 무대였다. 내가 알던 독일은 그냥 공중으로 뻥 찬 뒤 클로제나 다른 키큰 선수의 헤딩으로 어찌어찌 해보려는 팀이었는데, 어제 경기로 판단컨대 환골탈태를 한 듯하다. 정확한 패스에 이은 위력적인 슈팅이 경기 내내 나왔는데, 특히나 2대 0으로 앞서고도 계속 밀어붙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두시에 경기가 끝난 뒤 고민을 했다. 잘 것인가 그냥 날을 샐 것인가. 일단 자면 일어나는 게 자신이 없었기에 후자를 택했다. 그 동안 난 여자골프에서 우리 선수들의 경기를 도왔다. 장정이 1위, 김미현이 2위를 달리고 있는 게 모두 내 공은 아니겠지만, 그들이 내가 쏜 빔 덕을 본 건 분명하다. 4시가 지나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경기가 시작된 뒤에도 난 결정적 순간마다 채널을 바꿔 빔을 쏴줬다.


아르헨티나와 대결한 멕시코는 강팀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선제골을 넣는 등 선전했지만 아깝게 역전패했는데, 아르헨티나 선수의 2번째 골이 워낙 멋졌으니 보따리를 싸는 게 억울하진 않을 것 같다. 사실 이 경기의 전반전이 내 한계였다. 후반이 시작된 건 기억을 하는데, 그때부터 눈만 떴다 감으면 십분 내지 이십분이 지나 있었다. 아무나 이겨라 이러고 있었는데 글쎄 연장전에 들어간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자버렸다. TV를 켜놓고 잤기에 골이 들어갔다고 흥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6시 15분쯤 모닝콜이 울렸고, 난 테니스 멤버들을 전화로 깨운 뒤 다시 잠이 들었다.


7시 10분, 난 다시금 잠에서 깨어 테니스장으로 향하는 차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두시간 동안 무더위와 싸워가며 테니스를 쳤는데, 잠을 별로 안자고도 그렇게 잘치는 스스로가 대견하기 짝이 없었다. 11시, 다시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선발로 나오는 박찬호를 위해 빔을 쏴줬다. 너무 지친 탓일까. 내 빔은 별반 도움을 주지 못했고, 박찬호는 부진한 경기 끝에 패전투수가 되고 만다. 다음엔 잘 해줄게. 미안해 찬호!


박찬호가 강판하자마자 난 잠이 들었다. 한 세시간 정도는 잘 수 있겠다 싶었는데, 할머니가 너무 심심하셨는지 우유를 마시라고 두 번이나 깨운다.

“우유 안먹으려면 밥이라도 먹어라.”

“...드르렁...”

“무슨 잠을 이렇게 자? 처음 봤네.”

자는 와중에 할머니가 어찌나 얄밉던지.

4시 반에 일어나 대충 옷을 차려입고 뮤지컬 ‘맘마미야’를 봤다. 다시금 집에 온 건 밤 11시 20분, 이틀째 월드컵이 40분 남았다 (이날은 4시에 김병현이 등판하고, 여자골프 마지막 라운드도 겹쳤다...).


그간 체력을 충분히 비축했다고 생각했는데, 첫날 이러고 나니 무지하게 지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4년에 한번씩 하는 행사인데, 놓치지 말고 봐야지. 갈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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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퇴전문 2006-06-2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시 경기와 4시 경기를 풀타임으로 다 보기엔 체력적인 부담이 너무 크죠. 12시 경기 포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제 네-포 전 관전할 참입니다. 쥔장님의 스태미너가 상당하시군요.

마태우스 2006-06-26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퇴전문님/아앗 이밤에 깨어있는 분이 또 있으셨군요 반갑습니다아! 님은 12시 경기를 포기하셨군요. 잘하셨어요 베컴의 멋진 프리킥 한방과 루니의 동물적인 돌파 하나 말고는 별반 건질 게 없었다는... 물론 제가 축구 비전문가라 더 멋진 것들을 놓친 결과겠지만요. 지금이라도 한시간쯤 잘까 싶지만 여자골프 응원해야 해서 그것도 안되고....ㅠㅠ

중퇴전문 2006-06-26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니가 동물적이라면, 크라우치는 식물적일까요. 개인적으론 둘이 투톱으로 함께 뛰는 장관을 보고 싶지만, 가능하진 않겠죠. 그럼 열심히 달리시길.

마태우스 2006-06-26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퇴전문님/크라우치요..오늘 뛰려고 몸풀다가 베컴이 골 넣는 바람에 결국 못나왔죠. 오웬이 다치는 바람에 둘이 뛰는 광경을 아마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강전에서요. 님도 즐감하세요

모1 2006-06-2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빔이 그리도 위력적인지 몰랐네요. 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