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나이쯤 되는 사람치고 어릴 적 권투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때 난 링에 오르는 우리 선수들이 조국의 명예를 짊어진 사람으로 생각을 했고, 특히 일본 선수와 대결하는 날은 자뭇 비장하게 경기를 지켜봤다. “노 챔피언국 불명예”란 언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챔피언들이 우글우글한 미국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우리 선수가 아니라해도 잘하는 선수끼리 자웅을 겨루는, 세칭 “세기의 대결”이라도 벌어지면 수업을 빼먹고서라도 그 경기를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권투의 인기가 없어지면서 나도 점점 권투 경기를 안보게 되었고, 지금은 우리나라에 챔피언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간혹 케이블에서는 옛날에 벌어졌던 명승부전을 보여준다. 전성기 때 알리 모습처럼 볼만한 게 있긴 하지만, 지금 보니까 권투라는 건 참 잔인한 스포츠다. 남을 때려서 쓰러뜨려야 이기는 경기에 왜 내가 그렇게 열광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검투사들을 사자와 시합을 시킨 그 옛날 로마인의 피가 흐르는 탓이겠지. 하지만 내성이 올라간 탓인지 사람들은 권투 경기로는 만족을 못하고, 그보다 훨씬 잔인한 이종격투기를 본다. 발로 차고 머리로 받고 팔꿈치로 찍는, 난 도저히 그 경기를 볼 수가 없었다. 너무도 잔인하고 징그럽기에.(그렇다고 그 경기를 중계하는 것에 반대하진 않는다).
돌연 중2 때 일이 생각났다. 음악을 전공한 담임 선생님은 가을 소풍 때 권투 경기를 하라고 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중 한명, 11번부터 20번까지 중 한명... 이런 식으로 대표 6명이 토너먼트로 권투시합을 하는거야”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우리 번호대 대표는 누가 될거다”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때 우리반에 있던 교생 선생님은 이런 발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권투?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 놀 게 그렇게들 없냐?”
다행히 교생 선생의 설득이 먹혀 권투경기는 취소되었다. 당시에는 좋은 볼거리가 없어져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우리 담임은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말려야 하는 게 선생의 역할일진대, 싸움과 다름없는 권투를 어떻게 학생들에게 시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반 애들끼리 치고받는 걸 보면서 오르가즘이라도 느끼려고? 취소했기 망정이지, 소풍 가서 그딴 짓을 했다간 참으로 한심한 반이 되었을 거다. 무턱대고 동조했던, 인권의식이란 건 쥐뿔도 없던 우리들 역시 반성해야 하지만, 그런 사람이 우리에게 음악을 가르쳤다는 사실이 몸서리쳐진다.
* 그 담임은 애들한테 군것질을 하면 서로서로 밀고하라는 5호담당제 비슷한 행위를 시켰던 바로 그 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