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9월 9일(금)
누구와: 친구들과
마신 양: 맥주--> 소주--> 소주
난 비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비가 오면 잘 접힌 우산을 펼쳐드는 게 아까워 우산이 없는 척을 하면서 맞고다니니까. 그러면 대머리가 된다는 설이 있지만, 희한하게도 내 머리숱은 점점 많아져 가는 것같다. 좌우지간 지금까지 살면서 “비가 왔으면” 하고 바란 적은 딱 한번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이날은 비가 오기만을 바랐다. 간만에 만난 친구들이라 새벽에나 헤어질 예정이었고는데, 게다가 서울도 아닌 D 시티에서 술을 마시는데, 그 다음날 일정이 너무도 빡빡했기 때문. 어떤 일정이냐면.
6시 반: 친구랑 테니스 클럽에서 만나기로 약속함
9시: 보건원에서 4명이 모여 테니스를 치기로 함
2시: 선보기로 약속
5시; 미녀와 배드민턴을 치기로 함
대충 이런 스케줄이었다. 집에 가면 새벽 4시는 될텐데 두시간만 자고 저런 일들을 해야 하다니. 하지만 비가 오면 선을 제외한 나머지 약속이 무효가 된다. 배드민턴을 못치는 건 아쉽지만, 어쨌든 난 8시쯤 느긋하게 일어나 서재응과 김병현의 투구를 관람하다, 선만 보고 다시 들어와 집구석에서 자면 된다. 그러니 내가 기우제를 지낼만도 하지 않는가.
내 기도를 들었는지 D 시티에는 비가 쏟아졌다. 맹렬한 기세로 한시간 이상을 퍼붓는 빗줄기, 술을 마신 곳은 대형포장마차였는데 지붕 위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술맛을 돋웠다.
“비 잘 온다!”
난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다 9시에 테니스를 치기로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대한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거, 비가 와서 어쩌죠?”
그 사람의 답변은 내게 의외였다. “여긴 비 안오는데요?”
“...(잠시 침묵) 음하하. 전 또 비오는 줄 알고요. 그럼 예정대로 내일 뵈요”
혹시나 해서 난 6시 반에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라도 비가 오면 무조건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문자메시지는 끝까지 오지 않았다. 새벽 3시 반, 역무원의 거듭된 호소에 잠을 깬 나는 택시를 타고 집에 왔고, 두시간 반의 짧은 잠을 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리였다. 테니스를 치러 갔다간 죽을 것같은 기분, 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못가겠다고 했고, 한시간여를 더 잤다. 찌뿌둥한 몸이지만 9시 전에 보건원에 도착했고, 테니스를 칠 때는 야생마처럼 날라다녔다. 선을 보는 두시간 동안 즐겁게 수다를 떨었고, 미녀를 만나서 배드민턴을 친 뒤 소주와 더불어 저녁을 먹었다. 슬슬 피곤이 몰려왔다.
“저 어쩌죠? 오늘 2차는 못가겠는데요”
미녀는 흔쾌히 이해를 해줬다.
“다음에 해요. 전 괜찮아요”
그날 내가 잠든 시각은 9시 40분, 아마도 최근들어 가장 빠른 기록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난 5시에 잠에서 깨어나 테니스 치러 갈 준비를 차렸다. 난 뭐하는 인간일까. 테니스 선수?
*** 비가 오길 바랐던 나머지 한번은 채팅으로 만난 힘좋은 유부녀에게 테니스 강습을 하던 때였다. 그때 난 정말이지 비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