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이 있어서 6시 25분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왔다.

이것저것 일을 보고 난 뒤 2시부터 '고병리학회'에 참석.

간만에 열심히 들어보려 했지만,

나이도 있는데다 너무 무리한 탓인지 십분도 안돼 졸음이 밀려왔다.

이럴 때 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면 안잘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1) 안자려고 한 이유가 세미나를 듣기 위한 것인데,

그림을 그리면 어차피 세미나를 듣지 못한다.

2) 그림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한시간이 넘게 잤다.

오죽하면 발표자가 쉬는 시간에 내게 "많이 피곤하신가봐요"라고 하겠는가.

잠을 안자면서 세미나를 들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다.


참고로 맨 마지막 그림은, 세미나 때가 아닌,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린 거다.

어제 내가 나오는 라디오 프로가 백일째를 맞아서 '백일특집'을 마련했는데,

청취자 투표로 고정 코너를 맡은 게스트 네명을 뽑아 백일특집에 불렀다.

뭐 게스트가 몇 명 되지도 않는지라 4등 안에 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못들면 어쩌나 싶어 아내에게 투표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나오는 프로가 뭔지를 몰랐고 -채널은 물론이고 프로그램 이름도-

결국 투표를 하지 않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4등 안에 들어서 백일특집에 초청이 됐는데,

1등과 단 3표 차이라는 말에 무지하게 놀랐다. 

'아내가 해줬으면.... 우리 조교선생한테 부탁했다면...동료선생한테도 부탁했다면..?'

이런 생각을 잠시 해봤지만,

솔직히 지난 석달간 내 방송은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라디오를 '방송아카데미', 즉 방송감각을 기르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이라고,

그래서 가볍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게 주된 이유였다. 

오죽하면 작가한테 "방송 하기 싫어요?"라는 힐난을 받았겠는가?


그 힐난 이후 난 좀 달라졌고,

정성을 다해 대본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우리 프로는 스스로 대본을 쓴다)

그렇게 3주 가량이 지났을 때 작가가 날 불렀다.

"처음에는 롤러코스트였어요. 무지하게 긴장한 상태로 방송을 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좀 안정된 거 같아요. 반응도 좋아졌고요."

초창기 내가 긴장했던 건 내 대본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

충분한 준비를 한 지금은 긴장할 이유가 없다.

그 몇 주간의 소중한 경험이 날 2등으로 이끈 것 같다.

내 코너에 투표한 청취자의 소감을 보자.


-사람 냄새 나는 코너이기도 하며..준비성 있는 것 같고 듣기 편함.

-진솔한 마음이 저에게 전달되어서요...왠지 정이 갑니다.

-우리 옆집 아저씨 같기도 하고.. 오래도록 함께 해주세요.

-푸근하고 서민적인 인상이 좋고 (라디오인데???) 많은 정보도 귀에 쏙쏙 들어와서 도움이 많이 됩니다.

-털털하게 서민적인 인상을 풍겨서 정감이 갑니다.

-부담스럽지 않아서 편하고 좋아요.

-이웃집 아저씨같은 서민적인...


난 프로 방송인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말투가 어눌하고, 말실수도 많이 하는 지금의 상태에서 더 나아질 게 없단 얘기다.

하지만 사람들 중엔 이런 내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분들은 날더러 '오래도록 함께 해' 달란다. 

이 소감을 들으면서 그간의 날 반성했다.

차비 빼면 남는 게 많지 않은 출연료를 받는다는 이유로,

라디오의 시대는 이미 갔고, 듣는 이도 별로 없을 거라는 이유로

너무 성의없게 방송을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는 내가 하는 말로 삶에서 위안을 얻는데,

난 '잠깐 하다 말지'라는 한심한 생각으로 방송국에 갔다.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

그간의 난 그 프로에서 일개 게스트에 불과했다.

펑크가 나면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게스트.

하지만 그 소감을 듣고나니 비로소 난 그 프로의 손님이 아닌, 가족이 된 느낌이다. 

어차피 얼굴도 안되는데, 라디오에 뼈를 묻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같이 서울에 올라와 피곤했지만,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마음이 푸근했던 건 그런 이유였다.

라디오스타 마태우스를 기대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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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07-12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요일 아침방송에서 마태우스님 모습이 무언가 이제 방송에 적응이 되어 안정감이 느껴졌다고 생각했어요. 그 느낌이 맞았군요!

마태우스 2014-07-13 01:07   좋아요 0 | URL
앗 그랬나요? 그날 너무 말을 안해서 방송 후 머리를 쥐어뜯었는데...ㅠㅠ 암튼 안정감이 느껴진다는 거죠...? 희망을 갖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weetmagic 2014-07-1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눼~~
기대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