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머신을 뛴 거리는, TV에서 얼마나 재미있는 걸 하느냐에 달려있다. TV가 재미없으면 달리는 게 지루하고 힘들지만, TV에 빠지면 내가 달린다는 사실조차 까먹게 된다.
1. 6월 3일(금)
밤 10시부터 축구를 했다. 우리집 앞 맥주집은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광화문도 그렇단다. 아무리 그래도 난 3년 전처럼 흥분할 수 없었다. 월드컵 한달을 제외하고는, 축구는 내게 남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난 빅게임이 있는 시간에 맞춰 퇴근을 했고-사람이 없으니까-새벽에 축구를 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래도 봐야지” 하고 튼 축구는 너무도 재미가 없었다. 그걸 보면서는 단 1킬로도 달릴 수가 없었기에, 케이블에서 하는 <조폭마누라2>를 보기 시작했다. 케이블에서는 영화를 틀 때 중간광고를 삽입하므로, 그때마다 축구 쪽으로 채널을 돌렸다. 축구가 한숨만 나온 반면, 영화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이 영화가 그렇게 욕을 먹었던 그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기억을 상실한 신은경이 마초 남자들을 혼내주는 장면, 그리고 서민들과 애환을 나누며 지내는 장면은 흐뭇하기만 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웃기려고 삽입한 장면들이 하나도 안웃겼다는 것. 하지만 더 후진 영화가 천지인데, 이 영화에 왜 그렇게 비난이 쏟아졌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계기판을 보니 내가 뛴 거리는 대략 6킬로, 간단한 샤워를 한 뒤 누워서 영화를 봤다. 끝나고 나서 축구로 채널을 돌렸다. 0-1로 지고 있다. 옛날 같으면 가슴이 찢어질 일이지만, 의외로 담담했다. 난 더 이상 축구팬은 아니었다. 박주영의 동점골에 일어나 환호하긴 했지만.

맥스무비 별점평 4.27
2. 6월 6일(월)
황금의 3일 연휴라지만, 난 그다지 잘 보내지 못했다. 사랑니를 뺀 상처가 도대체 아물지 않았던 탓. 아픔을 이기려고 타이레놀을 때려먹고-왕창 먹는다는 뜻-자고, 깨고나면 또 타이레놀을 먹었다. 그러다보니 황금같은 이틀간 책도 별로 못읽은 채, 잠만 잤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밤 10시쯤 러닝머신을 시작했다. 뭘 하나 틀었더니 <역전에 산다>를 한다. 김승우와 하지원이 주연한 그 영화. 이 영화에는 나만 아는 추억이 있다.
어느 사이트에 젊은 영화감독이 글을 올렸다. 자신이 <역전의 명수>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이 영화의 감독인 박씨가 <역전에 산다>라는 제목을 붙여버렸다는 것. 영화 내용상 그런 제목이 붙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영화는 <역전의 명수> 말고는 붙일 제목이 없다는 것 등을 들어 그 감독은 박씨가 자신을 물먹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제목을 택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영화판이란 곳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며, 시나리오를 다 써줬는데도 감독이 지가 시나리오까지 쓴 양 행세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히치코크는 훌륭한 감독이다). 어찌되었건 <역전에 산다>는 흥행에 실패했고, 올해 드디어 개봉한 <역전의 명수>(정준호.윤소이) 역시 관객동원에 실패, 두 편 다 감독의 인생을 ‘역전’시키지 못했다.
이건 역전의 명수
이건 역전에 산다
그럼에도 난 <역전에 산다>를 재미있게 봤다. 보는 영화마다 재미있게 봤다니 눈이 있긴 있느냐고 의심하겠지만, 이걸 보면서 러닝머신 9킬로를 쉬지않고 뛰었으니 재미있게 본 건 확실하다. 매력적인 배우 하지원이 자신의 매력을 별로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원래 존재 자체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배우고, 두 세계를 오가는 스토리도 제법 흥미로웠다. 단점을 찾자면 무수히 지적을 할 수 있겠지만, 좋게만 평가하는 건 내가 심리검사의 CP(chief parent, 지배적 어버이) 점수가 3점으로 기록적으로 낮다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거다. 한가지 의문. 그렇다면 내가 혹평한 영화는 도대체 뭐야?? 참고로 맥스무비 별점평은 역전에 산다 5.47, 역전의 명수 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