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쇼 녹화날, 잠깐의 휴식 때 한 여성이 내게 책을 한권 내밀며 사인을 요구했다.
8년 전에 쓴 <헬리>였다.
순간적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책을 쓸 당시엔 안그랬지만 출간 몇 달 뒤부터 그 책이 부끄러워 책 얘기도 하기 싫어했었으니까.
근데 8년이 지나서 그 책을 돈 주고 산 여성이 있다니,
난 그분한테 주소를 물었고, “새로 낸 책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오늘 보냈다).
부끄럽게 생각하긴 해도 그 책을 낸 걸 원망하진 않는다.
책은 별로 안팔렸지만, 그 책 덕분에 제법 인지도가 오른 덕분에
그 후 민음사를 비롯한 유수의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의를 받아서였다.
<헬리>를 낼 때만 해도 원고를 들고 책내줄 곳을 찾아 헤맸던 걸 상기하면,
실로 놀랄만한 변화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 오늘, 우연치 않게 <헬리>를 낸 출판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책이 품절됐다고, 재출간을 하자는 거다.
“재고가 370권쯤 있었죠. 근데 니가 베란다쇼에 나가니까 그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결국 품절이 됐는데, 그 후에도 계속 찾는 사람이 있나봐요. 서점에서 재출간할 생각이 없냐는 문의가 왔어요.”
방송에서 단 한번도 헬리 얘기를 한 적이 없지만, 높아진 인지도는 이런 식으로 소비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난 당연히 재출간이 싫었다.
그 책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첫 번째 이유고,
헬리를 연구한 배리 마샬 박사가 노벨상을 탐으로써 내가 제목에서 주장했던 게 완전히 오류로 판명이 난 데다,
돈을 주고 살만큼 요긴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전화를 해서 싫다고 했더니 전화건 그분은 의외로 완강했다.
물론 난 재출간에 동의할 생각이 추호도 없지만,
혹시 내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어서 출간 후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1) 이북
헬리는 2005년에 나왔다.
꼼꼼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상 계약서를 아직까지 보관하지 않았지만,
설마 그 시절에 e-book에 관한 내용이 들어갔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인터넷서점을 뒤지다 헬리의 e-book이 2010년에 나왔다는 걸 알고 까무라쳤다.
책이 품절되지 않는 걸 안타까워하는 판에 이북이 웬말이람?
아무리 계약서에 포함이 됐다 해도 그런 일을 한다면 한번쯤 저자에게 연락을 해줘야 예의 같은데,
책이 출간될 당시 난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다행히 별로 팔린 것 같진 않다).
그래서 난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뭐 이런 곳이 다 있어?”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2) 인세
책을 낼 당시 난 부자였다.
지금은 그때보다 돈을 더 많이 벌지만,
거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송금하는지라 버는대로 다 썼던 그때에 비하면 명함을 못내민다.
그래서 난 출판사에서 인세를 주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전에도 난 인세를 받은 적이 없어서 으레 그런 줄 알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편집자가 어느날 전화를 하더니
2쇄를 찍었다고, 인세를 준다고 했다.
그런 전화를 받고나니 괜히 가슴이 부풀어, 통장 잔고를 수시로 확인하게 됐다.
하지만 한달이 지나도록 인세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편집자가 전화를 했다.
“이번주 토요일에 들어갈 거예요.”
그 토요일을 난 통장 잔고를 확인하면서 보냈지만, 인세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일이 두 번 더 반복된 후 편집자가 말했다.
“오늘 드리려 했는데 사장님이 이러시는 거예요. ‘야, 그거 좀 있다 주면 안될까?’”
그때 난 내가 전업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했지만,
작가에게 줄 돈을 최우선으로 하기보단 일단 뒤로 미루고 보는 출판사는
아주 잘 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에도 몇 번 더 “이번주 토요일에~”를 외치던 편집자는 결국 연락을 끊었다.
3) 재출간
그렇다고 내가 그 출판사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가진 건 아니었다.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내 책을 출간해 준 건 그 자체로 고마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재출간 얘기를 듣는 순간 그간의 추억은 탁하게 오염되고 말았고,
지금은 “출판사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라는 의문이 제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책은 팔리기 위해 내놓는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자나 햄버거같은 상품과는 조금 다르다.
햄버거가 당장의 만족만을 추구한다면, 책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독자들로 하여금
약간이라도 진동을 느끼게 해줄 것을 요구받는다.
내 책이 독자에게 외면받은 이유도 그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건 물론 내 탓),
시대가 뒤늦게 내 책의 진가를 알아준 것도 아니고,
단지 저자가 그 책과 하등 관계도 없는 일로 인지도가 올라가서 남은 책이 다 소진됐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찌됐건 창고에 쌓아둔 재고품을 처분해 300만원 가까운 돈을 벌었으니까.
하지만 그 인지도를 이용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돈을 벌고자 한다면
내 책이 ‘강호동의 삼겹살’과 다를 건 뭘까?(강호동의 삼겹살이 저질이란 뜻이 아니라, 책과 먹는 것은 달라야 한다는, 책우월주의자의 투정으로 생각해 주시길)
그런 이유에서 난 헬리의 재출간을 반대했지만,
분명히 반대의사를 전달했음에도 담당자는 “오류가 있으면 고쳐서 내면 된다”면서 재출간을 우긴다.
e-book의 추억이 있다보니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재출간을 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어제 내게 사인받은 여성이 헬리의 마지막 재고품일 확률이 높으니,
베란다쇼 녹화 때 또 다른 분이 헬리를 들고온다면 무조건 책 앞(혹은 뒤) 페이지를 확인해야겠다.
“2013년 8월x일 2판”이란 글자가 쓰여 있지나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