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험이란 나중을 대비하는 행위다. 극단적인 예가 자동차보험. 아무리 큰 사고가 났어도 보험사에 전화를 하고나면 그걸로 끝이다. 애 낳는 것까지 기다려 준다는 모 보험사의 광고는 과장이라 해도, 보험을 써야 할 일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비싸 보이는 보험료가 그다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거다. 자동차보험의 서비스가 어찌나 좋은지, 사고를 낸 측이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을 별로 안갖게 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의료보험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수입에 따라 매달 일정량의 보험료를 납부하지만, 큰병이라도 걸리면 가계가 파산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시절, 한달 입원비만 해도 600만원이던 그 때, 우리집은 정말 어려웠다. 내가 드린 100만원짜리 수표가 일주일 분의 병원비도 충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세월이 3년이었으니, 웬만한 재벌이 아니었다면 길거리로 나앉을 뻔했다. 돌아가시기 전, 아버님은 중환자실로 보내졌다. 그리고 사흘째 새벽에 돌아가셨다. 경황이 없던 와중에, 계산서를 받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사흘간-정확히 이틀하고도 4시간-의 병원비가 무려 210만원, 하루 70만원 꼴이었으니까. 이런 생각까지 했다.
‘더 오래 계셨다면 집 팔아야 할 뻔 했구나. 거기서 한달, 두달 입원해 있는 분들은 어떻게 살까?’
그러고보니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중환자실에서 3년간 계시다 돌아가셨다. 아들 셋과 딸 하나가 교대로 병원비를 댔단다. 다들 배우자와 자식들이 있을텐데, 용하다 싶었다. 교수로 재직 중인 그분이 사시사철을 옷 하나로 버틴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보험의 취지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라면, 의료보험은 진정한 의미의 보험은 아니다. 몸이 아파도 모든 게 무료인 서유럽 국가들이 부러울 수밖에.
내 가족이 큰 병을 앓으셔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만, 의료보험도 작은 병보다 큰병에 더 혜택을 주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족 중 하나가 아프면 거덜이 나니 ‘의료보험이 해주는 게 뭐냐’는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자동차보험은 아주 작은 수리를 해도 건당으로 보험료를 올린다. 사람들은 그래서 범퍼 교환 같은 경미한 수리는 그냥 돈을 내고 한다. 하지만 의료보험은 많이 쓴다고 보험료가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 환자들은 감기로 병원에 갈 때도 반드시 보험료를 지참한다. 감기로 인해 쓰는 돈이 15,000원이라고 하면, 환자가 부담하는 액수는 진찰료 3천원에 약값 2천원 정도고-이건 물론 틀린 액수다.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니다-1만원을 보험공단에서 지급한다. 이 1만원, 어떤 이에게는 분명 중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1만원이 아까워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의 슬픔도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그 1만원을 모으고 모아 큰병으로 집안이 거덜나는 사람에게 지급한다면 훨씬 더 보람있는 보험이 되지 않겠는가? 1만원이 아까워 병원에 못가는 사람이라면, 큰병에 걸리면 아예 진료를 포기해야 할 것,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을 바꿀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건당으로 보험료를 올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러면 정말 아픈 사람이 병원에 못가게 되고, 자칫하다간 병을 키우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질 테니까. 내가 말한 것은 한가지 방법에 불과할 뿐, 어떤 방법을 쓰던지 감기 환자에게 보험금의 상당 부분이 지출되는 현실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몇 년 전, 아마도 DJ 정부 때로 기억한다. 감기 환자처럼 진료비가 싼 경우에는 100% 본인부담을 시키는 방법을 강구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불만을 쏟아냈고, 메이져신문들도 사설로 반대를 표했다. 여론에 놀란 DJ 정부는 잽싸게 그 정책을 포기하고 말았다. 메이져신문의 반대는 이유를 알겠지만, 일반 사람들은 왜 반대를 했을까. 의료보험에 대한 불신, 그러니까 그나마의 혜택도 못받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일 수도 있지만, 자신만은 큰 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더 큰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암 보험 같은 걸 따로 드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럼 뭘까. 당장 1만원 혜택을 보는 것이 훗날 올지 안올지 굉장히 불확실한 큰 병에 대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젊디젊은 내 심복이 유방암 치료를 위해 쓴 돈은 지금까지 500만원, 누구나 큰병은 걸릴 수 있다. 당장의 혜택보다는 미래를 위한 의료보험이 되도록 머리를 맞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