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애가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팔짜에 없는 오페라-푸치니의 ‘라보엠’-을 봤다. 비싼 공연료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열린 오페라하우스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댔는데, 내가 앉은 곳은 R석이었다(2층 맨 앞줄). S석이 가장 좋은 걸로 알았던 나로서는 R석이라는 게 있다는 것, 그리고 가격이 14만원이나 한다는 사실에 놀라자빠질 뻔했다. 친구랑 나랑 두명이 갔으니 28만원, 그 돈은 신촌의 <용마>라는 곳에서 참이슬 두병과 더불어 갈비살 3인분을 먹고 찌개에다 공기밥을 먹는 짓거리를 무려....일곱번이나 할 수 있는 액수다. 그 돈을 기꺼이 낸 사람들은 오페라에 조예가 깊은, 그래서 공연을 보면서 본전 이상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겠지만, 나처럼 고급예술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표값이 아깝다. 실제로 난 공연 내내, 특히 1시간 가량 공연된 1막에서는 헤어진 여친 생각도 하고, 지겨워 죽겠다 왜이리 안끝나냐, 이딴 생각을 하면서 몸을 비비 꼬았다.


그렇다고 내가 오페라를 처음 보는 건 아니다. 성악과에 다니는 여자애를 사귄 적이 있어서 그래도 꽤 자주 오페라를 봤다. <춘희>, <박쥐>, 그리고 또..... 하지만 내가 의지가 없어서 그런지 난 오페라에 눈을 뜨지 못했고, 그녀와 헤어지면서 오페라와는 쉽게 작별했다. 알아듣기 쉬운 말을 놔두고 굳이 노래로 대화를 하는 배우들을 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용이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본 ‘라보엠’ 역시, 가난한 시인이 여자(미미)와 사귀다 감당이 안되어 헤어졌는데, 여자가 죽는 순간에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한다는, 매우 신파적이고 진부한 줄거리를 담고 있다. 우리말로 해도 못알아들을 텐데, 굳이 이탈리아어로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난 무대 위 전광판에 나오는 대사를 안좋은 눈을 찡그려 가며 봐야 했고, 그걸 보느라 무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보지 못했다. 역시 내가 오페라를 보는 건 까치에게 진주를 건네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 나는 그저 남들이 박수 칠 때 같이 쳐주는 것으로 관객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었다. 길고 지리한 공연이 끝났을 때, 난 사람들이 “앵콜!”을 외치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다는 것도 말씀드린다.


라보엠의 주인공 ‘미미’는 미국서 오랜만에 귀국한 홍혜경과 김씨인데 이름을 까먹은 모 여인이 번갈아가며 공연을 했는데, 홍혜경의 오페라는 공연 일주일 전에 이미 매진이 되었단다. 내가 본 것은 물론 김모씨의 공연이었는데, 까막귀인 나로서는 홍혜경이 나오는 걸 봤다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테니 김모씨의 공연을 본 게 더 잘된 게 아닌가 싶다. 공연을 보기 전 우리나라의 휴대폰 문화에 대해 걱정을 했었는데, 적어도 내 귀에는 한통의 전화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휴대폰 울리면 퇴장’ 같은 강압적 방식보다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문화로 정착되는 게 훨씬 좋은 것 같다. 오래 걸려서 그렇지. 휴대폰은 안울렸지만 사람들이 유난히 기침을 많이 하는 것이 귀에 거슬리던데, 그거야 뭐, 봄이라서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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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2005-03-0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아 듣기 쉬운 말을 놔두고 굳이 노래로 대화를 하는 배우들을 난 이해하지 못했다.- 저두요!
전 고급문화라고 일컫는 것들을 이해하는데는 능력(경제적, 이해력)이 없는 것같아 진즉에 포기했지요.

보르헤스 2005-03-09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페라라 아무래도 뮤지컬보다는 감정이입이 많이 힘들죠 특히나 여주인공 미미 같은경우에 가냘프고 여윈 폐병환자인데 나오는 성악가는 다들 한덩치 하니 원 ! 감정이입이 되야 제대로 오페라를 즐길 수 있을터인데..^^

플라시보 2005-03-0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도 대사를 노래로 전달한다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기에 (마당놀이나 판소리 뮤지컬 오페라 등등등) 멋지단 생각은 들어도 재밌다 좋다라는 생각은 좀처럼 하기가 힘들더라구요.

sweetmagic 2005-03-0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투란도트 보러갈거예요 ~

비로그인 2005-03-09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거 보셨습니다...들으셨습니다.
전 아직 전곡을 감상할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전혀 되지 못하나 여기 나오는 몇곡은 무지 좋아해요
그 중 젤 좋아하는거...
들을때 마다 온몸에 닭살 돋구 찌릿찌릿한..
특히 슬퍼지고 싶을때 잘 듣는 겁니다.
근데..
우습게도 실제 라보엠은 본적이 없어서 도데체 무슨 연유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설마 웃기는 장면에서 나오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 안되는데..)
이 노래를 위해서라도 추천 꽝!

Si Mi chiamano Mimi
미넬라 프레니,루치아노 빠바로티
캬랴얀 생전에 녹음된 겁니다.
빠바로티는 중간쯤 부터 나옵니다.


비로그인 2005-03-0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승이죠? 그죠?

panda78 2005-03-1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저 오페라 좋아하긴 하는데 가격의 압박때문에 실제로 본 건 세 번뿐이에요. ;; 이러면서 좋아한다고 하긴 좀 그렇지만서도..
저도 R석에서 관람하고 싶습니다. 부러워요, 마태마태님-

마냐 2005-03-10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머...'용마'는 어딘가요. 그 가격에 그런 럭셔리한 밥상을! (뭐 눈엔 뭐만 보인다구..^^;)

비로그인 2005-03-10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하나레이님. 올려주신 노래.. Si Mi chiamano Mimi, 이 노래 제목이 '나의 이름은 미미', 인가요? 검색해보니까 비스무리한 제목이 나오는데요. 적막한 봄밤에 듣고 있자니 정말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 근데 '라보엠'에서 '나의 아버지께'던가, 예전에 차 광고할 때 삽입됐던 그 노래도 나오나, 어쩌나..서남극단이라고 저희 지역 극단 단원들이 '라보엠' 공연을 했었는데 초대권이 있었음에도 못 갔었어요. 그때라두 함 볼 걸..아쉽네요..

2005-03-10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3-10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샤크 2005-03-18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생각하고 지겨워하면서 봤따니 굉장히 돈아까워요 그돈이면 내 한달 생활비인데 -0-;; 마태님은 역시 부자신가봐요.

마태우스 2005-03-18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크님/제가 글에서 충분히 설명을 안했군요. 친구가 표사둔 건데, 부인이 못가서 제가 대신 갔답니다. 제 돈으로 보면 정말 아깝겠죠. 저처럼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라면요.
마냐님/신촌에서 송아저씨 빈대떡집 골목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골목에 있어요. 찾기 대따 어려워요^^
판다님/판다님이 대신 가셨다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스텔라댓글님/무슨 말씀을...언제나 감사드리고 있다구 여러번 말씀드렸는데...^^
하날레이님/님의 노래가 알라디너들의 심금을 울리나봐요. 추천 감사드려요
매직님/투란도트가 뭔지 모르고 있다는...아아, 역시 전 무지해요...
플라시보님/그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같아요. 저처럼 모르면 아무리 좋은 오페라도 피그 앞의 펄이죠^^ 설마 님도 저와 같은 수준??
보르헤스님/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글구 가난하다는 사람들이 옷은 좋은 걸로 입어서 말이죠. 덩치 얘기는...멀리서 보면 살찐 거 잘 모르겠더라구요^^
dsx님/저도 그랬는데... 전 그냥 영화 좀 보고, 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여생을 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