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처에서 연락이 왔다.

입학식 날 2500명의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높은 분들이 결정했다고 하는데 제가 좀 사정이...” 이럴 수는 없는 일,

알겠다고 하고 나서 슬라이드를 쓸 수 있냐고 물었다.

슬라이드는 안됩니다.”

내 강의는 기생충 사진을 몇 장 보여주면서 공포감을 조장하는 게 90%인데

그걸 못쓴다니 갑자기 날개없는 갈매기 신세가 된 듯했다.

게다가 2500명이라니,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는 그 학생들을 어떻게 집중하게 만들까?

 

주제를 고민하다가 독서의 이점에 대해 강의하기로 했다.

물론 그 강의는 별반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강의를 주선한 그 높은 분도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오후에 다른 일로 만났을 때 세바시에서 했던 것처럼 기생충 얘기를 구수하게 해주실 줄 알았다고 한 걸 보면 말이다.

 

오후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스타강사인 여 에스더 선생님의 강의가 있었다.

학생들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동안 강의를 마련한 학교 측의 성의가 돋보이는 대목.

학교 선배에 뵙고 싶었던 스타강사고,

나랑 친분이 있는 홍혜걸 기자의 부인이기도 한지라 오는 시간에 맞춰 인사를 갔는데,

뜻밖의 등장에 에스더 선생님은 무지 기뻐하셨고

가실 때도 친히 와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정작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강의를 들으면서 난 에스더 선생님이 왜 비싼 강사료를 받는 스타강사인지,

에스더 선생님에 비해 내가 모자란 게 뭔지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난 내 말만 쫙 하고 마는 일방통행식 강의를 하는 데 비해

에스더 선생님은 청중과 소통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는데,

어떤 스타일이 더 집중도가 높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게다가 난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에스더 선생님은 학술적인 얘기를 가지고도 사람들을 여러번 웃게 만들었다.

 

과에 따라 오리엔테이션 일정이 다른지라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학생들이 강의를 듣는 엄마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난 끝났는데 어디 계시냐?”고 묻곤 했다.

그때 내 옆자리에 있던 한 어머니의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나 지금 강의 듣고 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다 들어야겠어. 세시까지만 기다려.”

내 강의가 그런 즐거움을 준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생각하니

별반 자신이 없다.

한번 강의를 들었다고 금방 스타일이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걸 의식하고 부단한 노력을 한다면 나아질 수 있겠지.

저녁 때 홍혜걸한테 연락이 왔다.

오늘 집사람 환영해줘서 고맙다...”

혜걸아, 그렇지 않아. 내가 고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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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2-2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도 이미 스타강사신걸요.
세바시 보는데 어찌나 흐뭇하던지요^^

마태우스 2013-02-25 01:15   좋아요 0 | URL
아, 그땐 정말 운이 좋았어요. 스타강사 되려면 매번 잘해야 하죠. 김미경씨 보니까 대단하더라고요.

saint236 2013-02-2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역시 강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마태우스 2013-02-25 01:15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글구 스타강사는 괜히 되는 게 아닌 것이, 오랜 시간 연습을 한다고 하네요. 부단한 연습, 제게 필요한 덕목이어요.

2013-02-26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