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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 TV에는 영화 채널이 여섯 개나 있다. OCN 두 개, MBC movie, 돈도 안냈는데 나오는 캐치원이 둘, 뭔지 잘 모르겠는 거 하나. 하지만 케이블을 통해 원하는 영화를 보기는 정말이지 힘들다. 언제 무슨 프로를 하는지도 모르는데다,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한다 해도 시작하는 시각에 딱 맞춰 TV를 트는 건 어려운 일, 그래서 난 케이블로는 한번 봤던, 그래서 앞부분을 안봐도 하등의 지장이 없는 영화들만 열심히 보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엊그제는 TV를 틀었을 때 영화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거다. <굿바이 레닌>이라는 제목만 봤다면 아마 안봤을 것이다. 레닌이 나온다면 왠지 이념적이고 딱딱한 영화일 테니까. 하지만 우연히 본 영화 설명을 보니 흥미가 당겼다. 독일이 통일된 지 모르는 사회주의자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독일의 통일을 숨긴다나? 이거 볼만하다 싶어서 봤고, 영화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어머니가 심장 이상으로 8개월을 쓰러져 있는 동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다. 동독에는 버거킹과 코카콜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물결이 상륙하는데, 아들과 딸은 ‘충격을 받으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충고를 듣고 어머니의 눈에 그런 게 안띄도록 갖은 묘책을 강구한다. 처음에는 TV를 감추다가, 영화감독이 꿈인 친구의 도움으로 거짓 뉴스를 촬영해 TV 뉴스인 것처럼 방영하는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코카콜라 제조 기술이 동독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서독에서 난민들이 동독으로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동독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을 수용하기로...”
어머니에게 진실을 감추고 거짓말만 늘어놓는 것이 효도일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사회주의에 누구보다 열심히셨던 어머님을 위해 거짓도 서슴치 않는 아들의 태도는 정말이지 감동적이며, 그 효도를 위한 친구의 헌신 역시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메시지도 전달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자신은 없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오랜만에 재회할 때, 병실에 누워있던 어머님이 계속 화장을 하면서 “나 예쁘냐”고 하는 장면도 리얼하고, 두분이 만나는 장면 대신 밖에 있는 아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도 영화가 신파로 흐르지 않게 해줬던 것 같다. 그리 돈을 많이 들인 것 같지는 않고, 내가 아는 유명 배우가 하나도 나오지 않지만, 참으로 멋드러진 영화를 봤다. 굳이 말하자면 케이블의 승리이자 때마침 TV를 켠 내 영감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