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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요 몇 년 사이에 읽은 책 중에서 “이 작가를 존경한다”고 할만큼 감탄한 책을 딱 하나 고르라면 단연 기시 유스케의 <신세계에서>다. 작가는 원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지만, 그 책에서 기시 유스케는 정말 완벽하리만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냈다. 그런데 그 책이 절판된 걸 보면-겨우 구해서 봤다-그렇게까지 많이 팔리진 않은 모양이다. 제대로 된 긴박감이 느껴지는 하권 중간 부분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게 쉽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데, 온갖 추악한 비밀들이 드러나는 마지막 부분이 그간의 노력을 모조리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는 점에서 책의 절판이 좀 아쉽다.
그 뒤 기시 유스케의 팬이 되어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은 죄다 사는데, 진정한 거장은 단 한편의 작품으로 승부하는 법이어서인지, 그런 감동을 다시 만나는 게 쉽지가 않다. <다크 존>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읽다가 던져 버렸고, <자물쇠가 잠긴 방>은 꼭 기시 유스케가 아니라도 쓸 수 있는 작품 같았다. 그러다 읽게 된 게 <크림슨의 미궁>, 학위 심사 때문에 인천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이 책을 들고 나갔는데, 심사를 마치고 다시 천안 톨게이트로 돌아올 때쯤 책을 다 읽어버렸다. 무인도 비슷한 곳에 버려진 아홉명의 남녀 중 한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건 배틀로얄을 비롯해서 너무 여러번 써먹어 이젠 식상하기까지 한 소재다. 나름의 재미가 있긴 했고, “정보가 제일이다”는 교훈을 주긴 했지만, <신세계에서>의 감동을 맛보는 건 다음 책으로 미뤄야 했다. 그래도 요즘 너무 오랫동안 리뷰를 안썼다는 생각이 들었고, 별반 한 일도 없는데 2012 서재의 달인 앰블럼을 달아준 알라딘 측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저질 리뷰를 한편 써보고자 한다.
아홉명의 남녀 중 여자는 딱 두명이었다. 한명은 나이든 아주머니에 성격도 이상한 걸로 묘사가 되니, 남은 여자는 서른살 가량의 ‘아이’란 이름을 가진 자. 이혼 경력이 있는 마흔살의 남자 주인공(후지키)은 처음에 이 여자를 그다지 예쁘게 보지 않았다. .“얼굴 생김새 보면 매우 평범한 일본인이었다”(28쪽) 게다가 아이는 눈초리가 사시 비슷했다. 그럼에도 이 넓은 정글에 여자라곤 딱 그녀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시선을 바꿔 놓는다. “아이는 개성적인 용모의 이민이었다. 두 눈의 초점이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 보이는 것마저도...여성적 매력을 자아내는 데 한몫을 하고 있었다.”(42쪽) 남자들은 여자를 어떻게 한번 해보려 하면 장점을 찾기 마련인데, 후지키는 “그녀는 예쁘다”라며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다.
게임 참가자 아홉 명이 만났을 때, 그들은 짝을 지어 동서남북으로 흩어질 운명이다. 여기서 아이는 후지키에게 북쪽으로 가자고 하고, 그녀에게 흑심이 있었던 후지키는 거기에 수긍한다. 그 보람은 177쪽에서 얻을 수 있었다. 깨끗한 물을 보자 아이가 수영을 하고 싶다고 한 것. 후지키는 당연히 하라고 한다. 옷이 물에 달라붙어 모든 게 보일 테니까. “후지키도 틈을 주지 않고 얼른 물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물이 정말 맑았기 때문에..모든 게 보였다.” 보고나니 더더욱 마음이 동한 후지키, “후지키는 부끄러워하며 뒤돌아선 아이의 목덜미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이제 둘이 일을 치는 건 시간문제.
그런데 위기가 닥치자 후지키는 후회를 한다. “파트너가 힘없는 여자라는 점이..훨씬 더 무거운 책임감과 압박감을 주었다. 신뢰할 만한 남자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했다.”(209쪽)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위기가 지나가자 다시 후지키는 본색을 드러낸다. “당신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더 알고 싶어. 모든 것을...”(263쪽) 아이는 놀라서 묻는다. “지금 내게 구애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 유치한 대화가 몇 개 오가고, 결국 그 일이 벌어진다. “후지키는 눈을 깜박였다. 아이의 눈동자 속에 달이 두 겹으로 비치는 듯했다.”(268쪽)
이제부터 스포일러. 목적을 이룬 후지키는 몇 번의 위기를 극적으로 이겨내고 자신의 나라인 일본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 장면. “...지금 후지키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한가지 뿐이었다....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413쪽) 하지만 난 안다. 후지키가 도쿄에서 다시 아이를 만난다면, 그녀가 더 이상 예쁘게 보이지 않을 것임을. 만나자고 하는 그녀에게 “난 이제 네가 지겨워!”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남자가 하는 말을 다 믿어선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