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본문 내용과 관계없습다.

** 한시간 반 동안 끙끙거렸는데요, 결론이 영 이상합니다. 용두사미라고 할까...

1. 자주란?

<러브 액츄얼리>에서 영국 수상으로 나오는 휴 그랜트는 부시를 빼닯은 미국 대통령과의 조약에 서명하지 않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 “위협을 하는 건 친구가 아닙니다!”

영국 국민들은 이에 열광하고, 유명 가수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음악’이라며 멋드러진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에 맞춰 휴 그랜트가 춤을 추는 장면은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돈, 돈 하는 세상이라지만, 사람은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법이다. 비인간적인 전향 공작에 저항하며 수십년간의 옥살이를 견뎌낸 장기수 분들을 보면서, 당장의 안일보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비단 장기수 뿐만이 아니다. 당장은 먹고살 일이 걱정되어 못된 사장에게 굴복하지만, 거기에 맞서 멋지게 사표를 던지는 꿈을 수없이 꾸는 게 우리네 일상이 아니던가.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우리가 ‘부시의 푸들’이라고 비웃는 영국 애들도 마음 속으로는 자주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명목상 자주독립국이다. 자주독립국이라 함은 ‘정치적 자주권(自主權)을 가진 독립국’을 뜻하는데, 이 기준에 의하면 미국이 시킨다고 군대를 보내 자국의 국민들을 테러의 표적이 되게 하는 나라는 자주독립국이 아닌 것이다.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된 뒤 시청앞 광장에 성조기가 게양된 순간부터, 우리는 사실상 미국의 속국이었다. 그런 상태가 수십년간 지속되다보니 노예 정신이 관성화되버려, 미국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기는 행태가 만연하고 있다. 우리의 이익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도 하고, 이번에 국회의원이 된 송영선 여사는 “미국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멋진 말을 하기도 했다. 노무현의 방미 때 한나라당 국회의원 한분은 노무현이 “부시에게 대들까 걱정”이라고 말해 자당의 사대적인 속성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그건 일부 고위층의 얘기일 뿐,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자주의 불꽃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 국민들 순수한, 인도적인, 박애 정신에 입각한, 하여간 그런 숭고한 의도로 이라크에 파병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 미국이 시키니까, 미국이 삐지면 우리 경제가 망하니까, 미군이 철수라도 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파병을 하자는 게 아니던가.


2. 자주에 관한 남북한의 차이

1960년 미군 간부인 파머라는 사람은 그 당시 꼭 필요한 과업이었던 군의 정화를 반대하는 발언을 한다. “...더 이상 조직을 흔들어 군사력을 약화시키지 말라”(앞으로 쓰는 글은 상당 부분 <현대사산책: 1960년대편>에서 인용함)

이에 국방장관 현석호는 파머의 발언을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했고, 참모총장 최경록은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반박하는데, 최경록은 이틀 뒤 이런 말도 했다.

“사대사상에 젖은 일부 몰지각한 고급 장성들이 자신의 연명책에 급급한 나머지 왜곡된 정보를 외국 장성에게 제공한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휴 그랜트가 그랬던 것처럼 최경록 역시 수천통의 격려편지를 받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미국에 대해 당당히 할 말은 하는 장군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경록이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자주는 자취를 감춘다. 북한에 비해 열세에 놓인 군사력을 미국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균형을 맞추는 당시 상황에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수도 서울에 외국의 군대를 주둔시킨 우리와 달리,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군대를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차이 때문일까. 나라를 빼앗길 위기를 미국의 도움으로 넘긴 우리처럼 북한 역시 중국의 도움으로 이북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었지만, 북한은 그들에 대해 할말을 했다. 북한의 기관지 노동신문에 실린 1964년 7월7일자 사설에서 소련을 이렇게 비판한다.

[모든 것이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학 모든 것을 자기가 승인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모두 ‘노(No)'라고 하는 제국주의자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깔보고 멸시하는 오만한 태도인가! 얼마나 오만하고 무례하며 부끄러움도 모르는 잠꼬대인가!...편하게 있고 싶다면 나발을 불지 않는 쪽이 좋다]

내용이 반미적이라는 이유로 <분지>의 작가를 구속시키기까지 했던 우리가 미국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중국이 북한의 형 쯤 된다고 생각하지만, 북한이 중국 말을 잘 들은 건 아닌 것 같다. 월남전이 일어나자 중국은 “미군이 월남전쟁에 매여 있는 지금이야말로 남북 무력통일의 기회”라면서 김일성이 무장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거절했고, 그 결과 양국 관계는 약화되게 된다. 나중에 중국은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고, 북한은 중국을 교조주의자, 종파주의자로 비난하기도 했는데, 심지어 중국과 대사 교환을 중단하고 국교를 차단하는 비상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일본 공산당에 대한 중국의 간섭을 비난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북한과 중국이 형제간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3. 자주의 대가

못된 사장에게 사표를 던질 때는 멋지기 그지없지만, 던지고 난 뒤에는 먹고 사는 게 걱정되는 법이다. 우리가 미국의 보호 아래 경제개발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반면, 모든 것을 혼자 치러야 했던 북한은 점점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게 된다. 소련의 몰락에서 보듯 사회주의 경제라는 게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군비경쟁 때문에 GNP의 30% 이상을 국방비에 쏟아붓는 나라에서 경제발전이라는 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더구나 북한은 87년 KAL기 폭파사건 이후 미국으로부터 테러국으로 지정되어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중이며, 90년대 중반의 물난리는 그나마 남은 경제력을 앗아갔을 것이다. 우리가 의료용으로 보내준 CT나 MRI마저 전기가 없어서 쓰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하니, 북한의 삶은 우리의 1960년대 수준도 못되는 게 아닌가 싶다.


어느 철학자는 “살찐 돼지가 되느니 말라빠진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했다지만, 아무리 자주가 좋다해도 먹고사는 문제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살아있는 돼지와 굶어죽은 소크라테스 중에서 택일을 하라고 하면 그 철학자도 쉽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난 비굴하나마 대미종속의 길을 택한 우리의 선택이 자주 지상주의를 택한 북한의 그것보다 나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는 거다. 어려울 때는 설설 기다가 좀 크니까 독립하겠다고 하는 것이 부도덕하게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에게 해준 것 이상으로 많은 이득을 챙겨갔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간 미국에게 할만큼 했다면, 이제는 좀 눈치를 덜봐도 되지 않겠는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우리는 지렁이보다도 못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가 미국을 필요로 하는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 역시 미국에게 필요한 존재다. 속국으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다보니 미국이 삐지기라도 하면 우리나라가 곧 파탄날 것처럼 생각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투자하는 미국 애들은 자신의 이익을 쫓는 것이지, 미국 정부의 지령에 따라 그러는 건 아니니까. 마찬가지로 미군의 철수가 당장의 남침으로 이어질 확률도 높지 않다. 과연 언제까지 친미사대를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된 데는 자주외교에 대한 기대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취임 초기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데 이어, 미국에 가서 했던 말들도 충분히 굴욕적인 것이었다. 오죽하면 사대주의를 기치로 내건 한나라당 애들까지 ‘등신외교’ 운운했겠는가. 그렇다면 노무현이 취임 이후 변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노무현은 원래 반미적인 정치인이 아니었지만, 조중동 등 사대를 표방하는 언론들에 의해 반미주의자로 낙인찍혔을 뿐이다. 노무현 정도가 반미로 오인될 정도로 뿌리깊은 우리의 사대주의로 보건대, 앞으로 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베네주엘라의 챠베스처럼 반미를 공공연하게 내세우는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자주와 반미가 같은 것은 아니며, 우리가 할 말을 하는 걸 반드시 반미로 여길 필요는 없다. 이번에 노무현이 북한 문제는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지만, 조중동의 탄식과는 달리 별 일이 없지 않는가.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은 해줘야 하며, 미국의 잘못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결코 반미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자주를 위해서는 깨어 있는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오끼나와 성추행 사건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분노가 클린턴의 사과를 이끌어 낸 것처럼, 여중생 사망 이후 뒤늦게 일어난 촛불시위는 부시로 하여금 비공식적이나마 사과를 하게 만들었지 않는가. 전쟁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자주란 큰일날 소리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자주는 쿨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각성한 젊은이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는 날, 우리 대통령도 영화 속의 휴 그랜트처럼 청와대에서 멋드러진 춤을 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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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4-12-28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대통령도 영화 속의 휴 그랜트처럼 청와대에서 멋드러진 춤을'

이 부분이 아주 맘에 듭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마태우스님

노부후사 2004-12-28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한과 남한의 예를 너무 결과론적으로 얘기하고 계시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미국에 대한 종속을 선택한 남한의 결정이 자주를 기치로 내걸었던 북한에 견주어 '결과적으로' 옳은 일이었긴 합니다만, 과연 그때 결정을 내렸던 작자들이 그런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을지는 의문이네요.

쩝... 예전에 과거사진상규명법 처리할 때 김기춘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당시 역사문제연구소장이 북한도 과거청산에 성공했는데 우리는 못했다고 말하니까, 김기춘이 이랬었죠. "그래서 북한이 우리 대한민국보다 경제적인 면에서 월등합니까?"

nugool 2004-12-28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자주" 이길래.. 무슨 자주일까 생각해 봤는데 다 틀렸습니다... ^^;;; 러브액추얼리에서의 멋진 수상의 발언은... 현실에서 그렇게 못한 것에 대한 한풀이 처럼 보이더라구요. 영국도 미국한테 어지간히 치이고 있으니 말이죠... 쓰신 페이퍼하고는 좀 다른 수다이지만.. 러브 액추얼리를 엊그제서야 봤지 뭐예요. 이상하게 연이 안닿는 영화였어요. 그동안 빌리기도 수도없이 빌렸었는데 계속 못 보고 다시 갖다 줬었거든요.

재밌게 보려고 일부러 그 영화에 대해 귀를 막고 있었는데.. 덕분에 재밌게 봤어요.

마립간 2004-12-28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멋있는 글입니다. 댓글을 쓰려 했던 내용이 마태우스님의 글 마지막에 나와 있네요. '자주'라는 단어는 쿨cool할 지 모르지만 책임과 노력이 필요한다는 것. 이라크 파병이 반미가 아니며 고구려 역사 왜곡에 대한 시정 요구는 반중이 아니며 자주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흥분해서 떠드는 것이 아닌, 설령 자주적인 입장을 취했을 때 올 수 있는 경제적 시련과 외교적 시련에도 국민이 하나 되어 극복하겠다는 결의가 우리에게 있는지... 조금 어렵게 살면 어떠한가.

(요즘 같은 경기 불황이 지속되더라도 분배와 자주를 얻을 수 있다면 가난하게 산 들... 라고 이야기했다가 어떤 사람에게 욕을 엄청 먹었습니다. ㅜ.ㅜ)

마태우스 2004-12-2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님께 칭찬을 받으니 기쁘기 그지 없네요....글보다 해석이 더 훌륭하신 듯^^

너굴님/그 영화 참 재미있죠. 얽히고 ˜鰕?갈등을 무난하게 잘 봉합하는 듯...웃기도 무지하게 웃었던 것 같아요.

에피님/결과론에 치우친 글이었다는 건 인정하옵니다. 한번만 봐주심 안될까요???

니르바나님/감사합니다 여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