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영화를 볼 때마다 종이 쪼가리에 뭔가를 적었다. 순간순간의 느낌을 적을 때도 있고, 인상적인 대사를 옮길 때도 있다. 내가 대사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걸 보고 “기억력이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그건 기억력이 아니라 필기력인 거다. 몇 년을 이러고 났더니 노트 쪼가리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버려, 적어놓은 종이를 잃어버리면 쓸말이 없었다.
<알 포인트>를 보기 전, 난 노트와 펜을 꺼내고 적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적은 건 거의 없다. 영화가 워낙 미스테릭해, 내 둔한 머리로는 내용을 따라가는 것만도 벅찼으니까.
“정일병이 누구지? 아까 지하실에 끌려가 맞은 얘던가?”
“목매 죽은 사람은 뭐하던 사람이지?”
“철모에 써있는 게 대체 무슨 뜻인데?”
이런 것들을 좋지 않은 머리로 생각하려다 보니 영화감상문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 턱이 있는가. 게다가 돌발적으로 나오는 공포스러운 장면들에 질려서, 뭔가를 적는다는 게 불가능했다.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장면도 전혀 이해가 안갔는데, 내가 노트에 쓴 건 이게 다였다.
[겁나게 무섭다. 내용이 이해 안가는 게 더 무섭다. 영화가 그다지 친절하진 않구나]

사진설명: 감우성이다. 나랑 나이가 같다는 걸 엊그제 알았다. 그걸 알고나니 거울 보기가 싫다...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아는 분이 쓴 영화 감상문 때문이었다. 평소 영화 감상문을 기차게 잘 쓰는 분인데, 그분이 쓴 감상문은 이랬다.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아는 감독인 것 같습니다. 영화 보는 내내 현실의 공포가 겹쳐져 가슴이 아프더군요.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최고였습니다.
p.s. 감우성. 제가 추구하는 궁극의 Sexy였습니다. 어흑~ T_T]
그렇다. 내공이 뛰어난 그분 역시 이 영화에 대해 할말이 없었던 거다! 그러니 내가 영화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굳이 한마디만 하자면 이렇다. 지금까지의 베트남전 영화들이 한국군의 용맹과 공산당의 무서움을 가르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 영화는 귀신의 무서움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전 영화보다 진일보한 작품이다.
베트남전 얘기나 하고 어줍잖은 감상문을 끝맺으리라. 베트남전 얘기를 하면 아직도 거품을 무는 사람이 많다. “누구 덕에 이렇게 잘 살게 되었는데!” 거기서 벌어진 양민학살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죽지 않아도 될 한국군 5천명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무리 구차하게 살아도 죽는 것보단 낫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들의 귀한 생명을 담보로 한 경제적 번영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2004년, 우리는 다시금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했다. 이제는 제법 먹고살만 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파병 논리는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 30년 전의 전쟁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우리나라,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잘먹고 잘살아야 만족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