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일요일 아침에 테니스를 칠 때다. 푸른 코트에 서서 라켓을 휘두르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삶이 힘들 때마다 난 내가 쳐낸 환상적인 스트로크를 생각하며 그 순간을 이겨낸다.
요 몇주간, 테니스가 잘 안되었다. 총알같이 날라가던 스트로크는 네트에 걸리거나 턱없이 아웃이 되었고, 어쩌다 들어가더라도 상대가 다 받아냈다. 울적했다. 뭔가 전기를 마련해야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라켓을 바꾸자는 깜찍한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니 96년 라켓을 산 이래 그 라켓을 9년째 써오고 있는 거였다. 그래, 이참에 바꾸자. 난 동대문에 있는 스포츠용품점에 달려가 2분만에 새 라켓을 하나 샀다. 테니스계의 황제란 별명답게 프린스라는 회사의 라켓을 골랐다. "이제 니넨 다 죽었어!" 난 벅찬 가슴을 끌어안고 일요일을 기다렸다.
새 라켓의 위용을 발휘할 것으로 믿었던 지난주, 하지만 난 쓰라린 가슴을 안고 집으로 가야 했다. 1승3패의 초라한 성적도 문제지만, 내 플레이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멋진 경기를 하면 지더라도 기분이 좋은 법인데, 그때의 난 정말 내가 아니었다. 시속 180킬로로 날라가던 공이 기어가듯 느렸고, 실수도 너무 많이 했다. 난 이 모든 걸 라켓에 매어져 있는 줄 탓으로 돌렸다. "이제보니 싼 줄을 맸네? 줄 바꿔서 다음주에 복수해 주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난 이따금씩 찾아와 날 괴롭히는 슬럼프가 길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하지만 금요일부터 내내 술만 퍼먹다 줄을 갈지 못했다. 할수없이 난 예전에 쓰던 라켓을 들고 몸을 풀었다. 연습을 하는데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라켓과 공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그런 느낌? 막상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친구들은 내 총알같은 스트로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막기가 무서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그런 스트로크들이 계속 코트에 꽂혔다. 그중 몇 개는 우리 테니스사에 길이 남을만큼 멋진 것이어서, 친구 중 하나는 "윔블던에 와있는 기분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평소에도 빨랐던 내 발은 오늘 따라 더더욱 빛을 발해, 끝났다고 생각하던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난 오늘 끝내줬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새 라켓으로 해달라"고 간청하겠는가. 성적은 1승3패로 부진했지만 경기 내용이 워낙 화려했던 덕분에, 난 내가 대충 정하는 이주의 MVP에 선정되는 기쁨을 안았다.
중요한 것은 라켓이 아니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나무로 된 라켓을 가지고도 이길 수 있는 법이다. 그 자신감을 난 오늘 찾았다. 그나저나 비싼 돈을 들여 산 새 라켓은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