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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국민국가 진보 개인, 반양장
권혁범 지음 / 삼인 / 2004년 2월
평점 :
권혁범은 참 괜찮은 사람이다. 난 내 스승인 강준만을 통해 권혁범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강준만은 권혁범의 민족주의 비판을 이렇게 비판했었다.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탈민족국가를 주장하는 것은 제3세계 지식인의 슬픈 운명이다"
스승에 대한 의존도가 컸던 그 당시, 강준만의 한마디는 내게 빛이고 진리였다. 그래서 난 권혁범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저작들을 읽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특히나 열광한 것은, 월간 <말>에 연재된 '남성깨기'였다. 그 연재물에서 권혁범은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여성 죽이기'를 비판했는데, 그걸 읽으면서 속이 다 시원했다. 이 책에서도 그는 진보남성들의 마초적 사고를 비난한다.
[그들은 과연 여성주의에게 말 걸고 있는가? 오늘날의 한국 남성이 만들어내는 현실 및 지식인 담론이 보여주는 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아주 저급한 수준의, 또는 적대적인 이해다...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대화하고 건전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자기 착각 혹은 나르시시즘적 최면 속에 빠진 강자들의 오만함과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왜 진보 남성들은 유독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지하고 몰상식한 것일까?(243쪽)]
물론 이 책은 여성주의에 대한 책은 아니다.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라는 제목처럼, 저자는 우리에게 뿌리깊게 각인된 국가주의의 위험에 대해 저자는 끊임없는 각성을 촉구한다. 왜? "일단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민의식이 자리잡을 때 거기서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의 삶과 자유가 피어나기 어려워"지니까. 우리가 한바탕 축제를 벌였던 2002년 월드컵의 붉은 물결도 그 증거란다. 재미로 노는데 뭐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하겠지만, 언론 보도와 달리 그걸 지켜보는 상당수 외국인들은 "붉은 악마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전율하거나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이효순의 말이다. "만약 일본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장기를 몸에 휘감고 대일본국을 외쳤다면 우리 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도 생각해 볼 만하다"
그당시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에 감격했지만, 그건 바꿔 말하면 하나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제를 뜻했다. 어느 혼혈 가수는 한미전에서 누굴 응원할 거냐는 질문공세에 휘말렸고, 나 역시 스페인전의 승리가 편파판정 덕이라는 친구에게 "너 일본 사람 아니냐"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외친 '대한민국' 속에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이주노동자들이 설 땅은 없었을게다. "혼연일체를 요구하는 논리에 의해 이익과 도덕적 정당성을 얻는 것은 항상 지배층"이며, 그들은 "이런 이벤트를 통해 사회의 모든 갈등을 은폐하며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당시 우리 사회의 캐치프레이즈였던, "이 국민적 에너지를 창조적 에너지로 바꾸어 국민통합과 국가 경쟁력 제고의 큰 계기로 삼자"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왜 그때는 당연하게 들렸을까.
"우리가 서구적 근대국가의 모습이나 근대적인 정체성을 최종적이고 이상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폭력, 차별, 억압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될 수 있다(58쪽)"라고 하는 권혁범이 있기에, 우리 사회의 앞날은 그리 어둡지많은 않을 것 같다. 비록 우리가 국가주의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