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가 어떻든, 배우 이름만으로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배우가 몇 있다. 한석규가 그렇고, 류승범도 그렇다(안젤리나 졸리도 내게는 그렇지만, 보고나서 늘 회의를 느낀다). 하지만 그 어떤 배우도 송강호만큼의 울림을 내게 주진 못한다. 이발사가 머리깎는 영화, 평이하기 짝이 없는 소재임에도 볼 생각을 한 것은 다 송강호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발사인 송강호가 이승만 시절부터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살아가는 이야기로, 집권 기간이 길었던 박정희 시대가 주를 이룬다. 한 나라의 역사를 조명해본다는 면에서 톰 행크스가 나왔던 <포레스트 검프>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이 영화는 독재자 치하에서 신음한 경험이 없는 나라 사람들은 공감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니 수출을 한다면 피노체트가 다스렸던 칠레 사람들이나 재미있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선거 없이 장기집권하는 걸 독재라고 하지만, 집권 기간이 더 긴 싱가포르 이광뇨나 말레이시아 마하티르의 독재와 박정희는 차원이 틀리다. 유신헌법에 관한 얘기만 하면 영장없이 구금되어 몇 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심지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한 유신시절은 세계에서 라이벌을 찾아보기 힘든 광포한 독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해빠진 지금 대통령이 하는 일을 가지고 "군사독재 시절에도 없던 일"이라며 거품을 무는 사람들을 난 이해할 수 없다.

문민대통령을 자임하던 김영삼이 IMF를 불러오자 난데없이 박정희 신드롬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박정희를 찬양하고, 어렵게 이룩해낸 민주화의 과실을 비웃는다. 난 그런 사람들이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측근비리'가 가장 심한 대통령을 묻는 모 월간지의 설문조사에서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김대중을 선택한 것을 보고 혀를 찬 적이 있다. 그의 아들들, 그리고 권력창출의 터전인 동교동계의 비리가 아무리 크다해도 대통령과 가깝다는 이유로 경호실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 시절에 비할 바는 못된다. 당시 중정부장과 경호실장은 법 위에 있었다. 경호실장이던 박종규는 걸핏하면 권총을 끄집어내 '피스톨 박'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중정부장을 하다 권력 밖으로 밀려난 김형욱은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았다.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치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김지하의 명시 '오적'은 그런 시대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였다.

영화에서 간첩들이 설사를 하자 박정희는 '설사를 하면 간첩'이라며 어린 아이까지 잡아다 고문한다. 모르긴 해도 그 에피소드는 민청학련사건을 풍자한 게 아닌가 싶다. 실체도 없는 사건을 조작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그 사건은 국제 사법연맹으로부터 "오늘은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는 말을 듣게 했으며, 영국의 한 신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랬던 사람들이 한국에서 불고있는 박정희 신드롬을 본다면, 그의 딸이 제1야당의 대표로 인기를 끌고 있는 현 상황을 본다면 우리나라를 얼마나 비웃을까?

흔히 공과를 따지자고 한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룩한 경제발전을 온전히 박정희의 공으로 돌리는 것도 동의할 수 없지만, 설사 그렇다해도 그가 저지른 인권탄압의 정도가 경제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에 박정희 추종자들이 왜 눈을 감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것도 모자란지 독재자의 기념관이 지어지려고 하는 한심한 나라, 박정희의 후광을 업고 정치판에 뛰어든 그의 딸이 그 당시 희생된 분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 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송강호의 연기에 웃고 울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이 착잡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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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5-08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박정희시대의 향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 한켠이 너무도 쓸쓸해지곤 합니다. 무수한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앗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그리워한다는 일은 김일성의 정권을 옹호하는 일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면서...

마태우스 2004-05-08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그러게 말입니다!!
곰도리님/앗! 이 영화에 대해 다른 분들이 훨씬 더 좋은 리뷰를 올려주셨는데...부끄럽습니다.

호밀밭 2004-05-08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강호라는 배우가 가진 자리가 점점 깊어지는 것 같네요. 정말 박근혜를 보면 망한 왕조의 비운의 공주인 양 행동하는 것이 참 그래요. 본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요. 메이저급 서재라 코멘트 쓰기 조심스럽지만 그냥 한 번 써 봅니다.

마태우스 2004-05-0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님/아이, 서재에 메이져, 마이너가 어디 있어요? 코멘트 감사드려요.

갈대 2004-05-08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메이저리거.. 전에 썼던 '나의 서재 네트워크' 기억나시나요?
마태우스님 서재는 이제 제법 큰 허브가 되었습니다^^

연우주 2004-05-09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저도 재밌게 봤는데 감상평을 미루니 더 쓰기 힘들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