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 행복하다. 하루에 한번씩은 아니더라도 나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는 남편도 있고 또 날 미워했지만 현재는 시댁에선 내가 실질적 왕이 되었고 아버지는 한세상 바람만 잡다가 이제는 엄마를 끔찍이 아끼시고 엄마는 아들딸 효도 받느라 정신 없어 사람들에게 시샘 받기 바쁘시고 나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는 여자친구 잘 만나 사랑 받기 여념이 없고....모두다 건강하니 이만큼 구색을 두루 갖춘 행복은 없으리라.
어느 누구에게나 깊은 상처는 있듯이 내게도 상처가 있다. 어쩜 남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닐 상처이지만 내게는 아주 깊고도 지워지지 않은 상처이다. 시간은 16년전으로 흐른다. 그날은 첫눈이 오는 날이었다. 어쩜 내가 첫눈이 오면 우울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날은 눈이 너무도 많이 내렸다. 난 그날도 변함없이 빈집에 혼자 도착했고 오빠를 기다려야 했다. 눈은 너무 많이 오고 어린 맘에 얼마나 좋았던지 혼자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내 주먹만한 크기에서 머리통만큼 굴렸으니 작은 손으로 얼마나 정성을 쏟았겠는가?? 멀리서 낯익은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원래가 아빠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면 엄마 집과의 인척관계가 돈독한 법 외삼촌 딸 '미'언니였다. 언니는 날 보고 얼른 뛰어와 눈덩이를 밀쳐내고 나의 손목을 쥐고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얼마나 화가 났던지..난 아마도 족히 한시간은 넘게 눈을 굴렸는데 언니는 눈을 야맬차게 밀쳐버린것이다.
난 감지했다. 어리다고 해서 맨날만날 인형만 가지고 노는데 정신팔리는것은 아니다. 아이이기에 더욱 많이 생각하고 더욱 많은 호기심이 있어서 아주 예민한 정신을 가졌다. 언니가 이 시간에 집에 들른 것도 수상했고 나만 보면 이뻐서 안아주기 바쁜 언니가 얼굴도 건성으로 보고 집으로 끌고 들어온 언니가 이상해서 난 물었다. 언니 무슨 일 있어?? 언니는 아무 말도 않고 장롱에서 마구잡이로 이불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걸로 몇 장 꺼내서 보자기에 대충대충 포장했다. "엄마가 많이 다쳤어!!" 그 말뿐이었다.
언니는 그리고 휑하니 가버렸다. 오빠랑 같이 집에 있으라는 말만 남겨놓고 그날 밤 오빠와 나는 엄마 없는 밤을 보냈다.
엄마가 없다고 해서 무서울건 없었다. 아빠의 부재로 엄마의 생활력은 대단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수를 세어봐도 엄마는 열 세가지일를 해본 경험이 있었으니....지금 생각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엄마 직업은 딸기 공장이다. 딸기잼을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하는 회사라 했다. 딸기공장이라 해서 기억에 남는 건 아니고 거기서 가져오는 빵이다. 엄마는 주 3교대 교대근무를 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그때는 그저 새벽이나 낮이나 밤이나 엄마가 빨리 와서 우리에게 빵을 주기만을 바랬던 기억밖에 없다. 오빤 그런 내게 "그건 엄마가 저녁에 배고플까 봐 회사에서 주는 거니까 엄마가 먹어야 해 그러니까 자꾸 기달리지마 안 가져올 수도 있어" 간혹 나에게 그런말를 했다. 그럼 난 지지않고 "엄마는 빵 별로 안 좋아해~"했다.어느날은 엄마가 회사에서 빵을 가져오지 않았다. 엄마가 배가고파서 드셨을 텐데 우린 철 없이도 실망하는 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그땐 그랬다. 근데 미안하게도 난 아직도 빵을 좋아한다. ^^
그날 언니가 그렇게 간 후 일주일간 우린 오빠와 둘이 남겨졌고 느닷없이 아빠가 오셨다. 일년에 다섯 손가락 꼽을 정도로 드나들던 아빠가 오신 거였다. 오빠와 나는 "일요일 날 병원 가자 엄마 거기 있다."는 말만 들었고 우린 지루하게 일주일을 보낸 후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엄마는 우릴 보고 좋아서 눈물을 흘렸고 오빠와 난 "엄마 어디 아파??"라는 말만 연신 했고 엄마는 "괜찮아"라는 말만했다. 오빠와 나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나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오른손을 잃었다는 것을....오빠와 나는 속도 없이 왜 그렇게 많이 울었는지...
엄마는 우리 땜에 회사는 못 다니고 가까운 떡 공장을 다니고 계셨다. 하루에 4시간 자고 주야로 팽팽 도는 공장에서 그리 열심히 일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일은 많이 해야 우릴 먹여 살리고 또 가까운 곳에 있음 심적으로 안정이 되니 그런일를 하셨던 게다. 그런데 일을 하시면서 가래떡 뽑는 기계 손을 넣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미처 못보고 기계를 돌린 거였다. 그리고 엄마의 손은...그렇게 된 거였다. 엄마는 부서진 오른쪽 손을 고무장갑채로 왼손으로 감싸고 병원으로 간 것이다. 엄마는 순간 우리 결혼할 때 촛불을 켜야 하는 상황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 한 손이 뭉텅하니 없으면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이냐며 있는 대로 붙여달라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지금은 온전치 못한 오른손을 가지고 계신다. 그때 엄마 나이 서른일 곱이었다.
엄만 오른손의 댓 가로 어느 정도의 돈을 받았지만 또 그걸 가만둘 울 아빠가 아니었다. 사업한답시고 다 말아먹고 엄만 이제 거리의 노점장사로 나 앉아야 했다. 생선장수, 과일장수, 채소장수....엄마는 그렇게 돈을 버셨고 오빠와 둘은 가난하지만 고생 모르고 자랐다. 오빠와 내가 고생을 좀 했더라면 엄마가 좀 편 할 수 있을 텐데 우린 늘 풍족하기만 했고 엄만 늘 그걸 채우기 바빴던 거다.
난 당연히 실업계로 진로가 예정되었고 사회에 일찍 뛰어들어 누구 말잖고 능구렁이가 다 되어 상대가 여차하면 바로 대응할 수 있는 말빨과 성격을 지녔다.
지금은 엄마 행복하시다. 오빠와 나는 머리가 굵어져서 인생의 순위는 엄마가 되었고, 사춘기 때 증오가 넘쳐 칼을 들으면서까지 결단을 내자고 아빠한테 대들던 오빠가 지도 남자라고 아빠를 이제는 두둔하려 든다. 엊그제는 엑스파일이 "어머님은 아버님이 용서가 되실까?? 어떻게 시골에서 같이 지내고 그러실 수가 있어?"라고 물었다. 난 내가 19살때부터 돈을 벌면서 느낀 건 자식은 부모를 평가할 수 없다는 거다. 부모가 살인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의 부모인 이상 판단할 수 없고 엄마는 30년동안 풍파 속으로 내쳐 아빠가 미운 만큼 남은 인생 아빠는 엄마한테 볶이며 순종하며 사는 모습을 즐길 권리도 있다. 물론 엄마는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분이시고 '남은 인생이 아까워 그리 어찌 사냐'라고 나한테 이야기한다. 난 엑스파일에게 "자기가 안모실거면 아무 소리하지말고 있어~"하고 말았다.
내일은 어버이날이다. 엄마는 할머니와 아빠가 계신 곳으로 가셨다. 아들 잘못 낳아 며느리한테 대접도 못 받고 혼자 살고 계신 할머니한테 엄마는 죄스러워서 시골에서 오래 머무실 예정이란다. 그래야 돌아가셔도 맘의 짐을 졸 덜를수 있을것 같다 하신다. 난 오늘도 엄마에게 감사하다. 사랑할 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주신걸 말이다.
효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