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보니 돈이 별로 없다. 맨날 그렇게 놀러 다녔으니, 돈이 바닥에 근접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오늘은 돈 안쓰고 조신하게 살아야지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나더니 내 지도학생이 들어온다. 잊지 않고 나를 찾아온 걸 보면, 작년 1년간 그가 의사고시 재수를 할 때 밥을 사줘가며 격려를 해준 게 도움이 되었나보다. 인턴을 하는 대신 군대에 지원한 그는 4주간의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터였다. 온김에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지 싶어 그가 원하는대로 중국집에 가서 있는 돈을 다 털어서 탕수육을 사줬다. 생즉사, 사즉생이라고, 돈을 아끼려면 쓰게 된다는 옛말을 실감하게 된다. 이젠 카드 되는 곳만 가야겠다...

4주 동안, 그가 가장 힘들었던 건 훈련이 아니라 '자유의 박탈'이었다. 통제된 곳에서 한달간 지내면서, 그는 자유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가 숨쉬는 이 자유의 공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절실히 느꼈다나.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는 병영사회에 가깝다. 오랜 기간의 군사독재는 군사문화를 사회 곳곳에 이식시켜 놓았고, 그 잔재는 아직도 끈질기게 남아 사람들을 괴롭힌다. 회사에서 직장 상사가 아래 직원들에게 폭탄주를 먹이는 것도 군사문화의 일종이지만, 그런 게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중고등학교가 아닐까 싶다. 똑같은 옷을 입히고, 지금은 아니지만 머리를 짧게 깎기를 강요하고, 일과 후의 생활도 통제를 받는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자율성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숨막히는 분위기 탓인지도 모른다.

누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중학교 1학년인 누나 아들, 그러니까 내 조카가 졸업선물로 받은 휴대폰을 빼앗겼다고 그게 나 때문이란다. 친구도 별로 없고 부모와도 말을 거의 안하는 조카는 나에게는 유독 마음을 열었고, 그와 나는 휴대폰 메시지로 많은 말을 나누어 오던 터였다. 내가 이틀만 메시지를 안보내도 "삼촌 요새 바빠?"라는 메시지를 내게 날리곤 했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던 중 조카 생각이 나서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기현아, 벌레삼촌이야. 학교갔니? 삼촌은 오늘도 지각이다^^"
그게 원인이었다. 휴대폰을 끄는 걸 깜빡했던 탓에, 조례를 하던 담임의 귀에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 포착된 것. 휴대폰에 민감해 절반 가까운 학생의 휴대폰을 빼앗았던 담임은 당연히 내 조카의 휴대폰을 빼앗았고, 한달간 돌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풀이 죽은 내 조카, 집에 와서 이렇게 말한다. "삼촌은 왜 그때 메시지를 보내서..." 4월 1일날 무슨 게임을 다운받는다고 들떠있었다는데(요금이 2만원 정액제라 다음 달이 돼서야 그게 가능하다나? 이해를 잘 못했음).....

휴대폰을 끄지 못한 것은 조카의 잘못이다. 하지만 한달씩이나 그걸 압수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 담임 자신도 휴대폰이 없으면 불편한 것처럼, 학생들 역시 휴대폰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겠는가? 아이들이 휴대폰이 무슨 소용이냐 하겠지만, 나이든 사람들 역시 과히 생산적이지 못한 수다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가. 미안해진 난 누나에게 "학교 가서 달라고 우겨봐!"라고 졸랐지만, 누나는 당장은 면목이 없으니 며칠 있다가 가보겠단다. 이래서 난 조카의 눈밖에 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나쁜 담임 같으니...

내가 중 2 때 담임 선생은 우리에게 군것질을 하지 말라는 걸 캐치프라이즈로 내걸었고, 하다못해 매점에서 사먹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 일환으로 담임은 같은 반 친구 중 누군가가 군것질을 하면 반드시 자신에게 고자질을 하라고 시켰는데, 난 한번도 다른 이를 고발하지 않았건만, 언젠가 햄버거 한쪽을 얻어먹었던 난 고발을 당해 벌금을 냈다. 친구가 친구를 감시하는 사회에 살면서 북한의 5호담당제를 비판하는 아이러니, 그토록 비교육적이던 학교 풍토가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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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3-30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저도 고등학교때 삐삐가 울려서 당황한적이 있습죠!! 다행이도 중학교때(재단이 같으면 선생님이 돌고돈다)담임선생님이 고등학교로 와서 날카로운 시선 한번으로 그쳤지만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그래도 다시 돌려준다는게 어딥니까??우리때는 삐삐, 반지, 목걸이. 만화책 모두 졸업날 가져가라 했는데....세상 좋아졌네요....마태우스님은 그때쯤 사랑의 스튜디오에서 "우글우글합니다" 그러시지 않았나 혼자 계산한번 해봅니다

호랑녀 2004-03-3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초등학교두요.
3학년인 제 아이, 도서부장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도서부장이 뭐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주고(좋지요), 수업시간에 만화책을 보는 아이를 선생님께 이르는(물론 선생님은 말하는 이라고 하셨겠지요) 일을 한답니다.
반장 부반장은 선생님 없을 때 떠드는 애들 이름 적어서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게 임무이고, 또 주번(질서지킴이)은 복도에서 뛰는 사람 적어서 선생님께 일러바치는 것이 임무이고...
5호담당제가 파바박! 떠올랐습니다.

마냐 2004-03-30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말씀은 정말 슬프네요. 휴대전화 한달 빼앗긴 마태우스님 조카도 그렇구....그나저나 마태우스님의 '시테크'는 놀랍네요. 일하랴, 학생 챙기랴, 조카 챙기랴, 폐인 업무 보시랴..책 읽으랴..광화문 가랴.. 술 마시랴....^^

연우주 2004-03-30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얘기하니까 찔리는군요. 저도 핸드폰 여러 번 뺐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