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팔이가 큰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엔 방이 두칸 있었는데, 한칸에만 사람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긴 더러운가보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이 급해 그 화장실에 들어간 병팔이는 깜짝 놀랐다. 너무 깨끗해서. 일을 보던 중 병팔이는 왜 다음 칸에만 줄을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엄청나게 야한 얘기가 화장실 문에 씌여 있는데, 결정적인 장면에서 이렇게 끝이 나 있었으니까. "다음 칸에서 계속"
어릴 적부터, 공중 화장실에 씌여진 낙서를 볼 때마다 불쾌감이 일었다. 성행위 혹은 여성의 몸을 그린 그림들같이 유치했고, 이웃집 누나가 등장하는 야한 얘기들은 역겹기만 했다. 대학에 간 뒤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난 생각했다. 좀 유익하고 즐거운 낙서가 화장실에 있으면 안되는 걸까? 그 낙서를 보러 먼 곳에 있는 화장실을 찾게 만드는 건 불가능한 걸까? 그런 낙서가 존재한다면, 낙서를 통한 사람들간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테고, 즐거운 맘으로 큰일을 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저질 낙서가 난무하는 것은 누가 썼는지 모르기 때문, 난 낙서 실명제를 실천에 옮겼다. 네임펜을 갖고 다니며 고뇌의 흔적이 엿보이는 낙서를 했고, 그 밑엔 꼭 내 닉네임인 '마태우스'를 적어넣었다. 지금도 쓰고 있는 '마태우스'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아쉽게도 그때 내가 한 낙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별로 기억에 없다. 대충 이런 식이다. 문 맨 위쪽에다 말 그림을 그려놓고, "여기다 낙서한 사람은 뭐가 길까요? 1) 다리 2) 허리 3) 왕십리 4) 기타" 이게 뭐가 웃기냐 싶을게다. 적고나니 하나도 안웃긴 것 같아, 다른 걸 적는다. 낙서가 붐을 이루어 더 쓸 공간이 없어지자 어떤 사람이 하얀 종이를 붙여 놓고 마음껏 낙서를 하라고 했다. 난 오른쪽 밑 귀퉁이의 종이를 쥐꼬리만큼 찢은 뒤 이렇게 썼다.
"죄송합니다. 휴지가 없어서..."
음.. 이것도 안웃긴 듯. 유지하긴 하지만 그런 낙서들이 누나 얘기가 주종을 이루던 낙서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 낙서 뒤에 이런 댓글을 단 사람도 있었다.
"마태우스, 더 이상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지 말라. -일레우스-"
"마태우스, 잡히면 죽는다! -청소 아줌마-"
난 들은 적이 없지만, 어떤 이는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마태우스란 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조교로 근무하게 되면서, 난 더 이상 낙서를 하지 못했다. 낙서가로서의 명성이 있었기에, 누가 낙서를 하면 무조건 내가 의심받는 상황이었으니까. 심지어 내가 하지도 않은 낙서가 우리 층에 되어 있을 때, 행여 오해를 살까 두려워 빡빡 지우기까지 했다. 대학에 둥지를 튼 지금도 난 여전히 낙서를 못하고 있다. 나 말고 낙서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소하는 아주머니들과 제법 친해져, 그분들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다른 청소 아주머니들도 그러리라는 생각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다른 곳-예컨대 기차역이랄지-에서의 낙서도 주저하게 만들어, 요즘의 난 낙서를 거의 하지 않는다. 좋은 낙서는 화장실에서의 무료함을 덜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법이니, 그런 낙서들은 그냥 남겨두면 안될까. 지금의 난 훨씬 멋진 낙서를 남길 수 있는데 말이다.
* 이전에 쓴 글에서 제가 일부 분들의 기분을 불쾌하게 했습니다. 어느 분의 지적을 받고 다시금 읽어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그래서 지웠습니다.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근데 누구신지 까먹어서, 이렇게 글 밑에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