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1월, 난 <사랑의 스튜디오>라는 짝짓기 프로에 나갔다. 기생충이라는 희한한 전공을 한 탓에, 그리고 "맘에 드는 여자분이 있느냐"는 질문에 "우글우글합니다"라고 대답한 덕분에 길거리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이 제법 있었고, 그래서 난 그로부터 한달간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걸었으며, 술도 음침한 곳에서만 마셔야 했다.

그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그 후로 <이소라의 프로포즈>같이 유명한 프로에도 나왔었건만, 사람들은 아직도 날 <사랑의 스튜디오> 출연자로만 기억한다. 작년말 일이 꼬여 병원에 사흘 입원했을 때, 사람들은 내게 "어디서 많이 봤는데..."라며 머리를 갸웃했고, 퇴원하는 날 결국 내 정체를 알아냈다. "아, 거기서 봤구나! 안그래도 우리 조카가 어쩌고 저쩌고"

그 프로가 방영된 다음날, 내가 일하던 곳에는 하루종일 전화가 왔다. "잘봤다"는 지인들의 전화야 그렇다치자. "재미있게 봤다"고 운을 뗀 후 "저희 신문사에서 이번에 부수 확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코노미스트>지 좀 봐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은 도대체 뭐며, 알았다고 수락하고 일년이나 그걸 본 나는 또 뭔가? 더 황당한 일은, 그로 인해 <토익 아카데미>라는 44만원짜리 테이프를 산 것. 목소리가 이쁜 여자가 한두번도 아니고 한 6개월을 전화를 걸어 오기에 할수없이 계약을 했는데, 그 테이프는 물론 집안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다 (언젠가는 공부할 생각이 있다). 얄미운 생각이 들어 18개월 할부로 끊었건만, 나중에 알고보니 그 회사는 돈을 나눠받는 게 아니란다. 그 기간 동안 수수료를 꼬박꼬박 부담했으니 나만 손해인 셈이다. 담당자의 목소리와 외모가 반대였던 것도 아쉬운 대목.

그 전화 중에는 몇 년 전에 헤어졌던 여인도 있었다. TV에서 내 목소리가 들려 너무 놀랐다는 그녀는 나와의 만남을 원했고, 그래서 한번 만났다. 헤어질 때 내가 거의 일방적으로 도망갔기에 죄책감도 있었고 해서. 놀랍게도 그녀는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난 끝내 그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그녀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래서 무지하게 미안했다). 아주 우수한 디자이너 자질이 보였으니, 지금쯤은 자기 이름을 건 브랜드를 출시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편지도 한통 받았다. 미국에서 날라온 건데, 대학 때 나와 사귀던 음대생이 발신인이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비디오로 내가 나온 방송을 봤다고 했으며, 그 인연으로 귀국 후 몇 번 만났다. 그녀의 섹시한 모습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꽤 이름있는 소프라노가 되었다.

방송은 이렇게 잊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방송에 나오려면 잘못을 하지 말아야 한다. 방송 출연 후 빚쟁이들이 몰려온다든지, 원한을 가졌던 사람이 달려와 린치를 가한다든지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때와 달리 나도 살아가면서 잘못한 일이 제법 많아져, 공중파에 나가지 못하는 몸이 되버렸다. 어차피 방송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 잘된 일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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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3-27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중파에 나가지 않아도, 케이블에 나오셨잖아요~ 요샌 케이블의 힘도 장난이 아닐껄요~ ^^

진/우맘 2004-03-2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라....인기가 아주 많았다는(정확히 표현하면 여자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다는^^) 간접 증거가 글 여기저기에 출몰하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