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겨울에 아프리카 놀러 안갈래? 텐트치고 사자랑 야영도 하고, 일주일에 180만원이래"
"어, 그렇게 안비싸네? 기린 보고 싶은데..."
얘기의 소재가 떨어졌는지, 옆 친구가 내 휴대폰을 만진다.
"우와, 최신 휴대폰이네. 한번 보자"
휴대폰의 폴더를 열자마자 그의 얼굴빛이 변한다. 내 휴대폰의 대기화면은 촛불시위 사진이 찍혀있고, 그 밑에 '희망의 촛불'이란 글귀가 씌여져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노무현에 대한 성토가 시작된다.
"품위없는 대통령은 진작에 물러났어야지"
"고건이 영원히 계속했으면 좋겠어"
내가 노사모라는 걸 누군가가 말하자, 한 여자애가 놀란다. "세상에, 너 노사모야????"(대선 후 탈퇴했지만, 한번 노사모는 영원한 노사모다)
그녀에게 노사모는 급진좌경친북단체, 그런 사람과 같이 술을 마셔왔으니 놀라울 만도 하다. 어제 모인 여섯 중 다섯이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들, 확률상으로는 그렇게 모이기도 힘든 법이다. 국민의 20%만 탄핵을 찬성하니, 찬성하는 사람들 둘이 만날 확률은 4%, 셋은 0.8%, 다섯은 0.032%다. 그런 희박한 확률이 내 주변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이유가 뭘까? 답은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는 '유유상종'의 법칙, 내가 스스로 기득권이라는 걸 느끼는 때는 바로 그런 경우다. 특권의식으로 뭉친 사람들 속에서, 다른 이념을 가진 난 '미운오리새끼'가 될 수밖에 없는지라, 누군가가 "정치 얘기 하지 말자"라는 말을 할 때까지 난 침묵을 지켰다. 이념을 초월한 친구 관계는 역시나 어렵다.
화제는 얼마 전 죽은 대우건설 사장에게 돌아갔다. 정몽헌, 안상영에 이은 노무현의 세 번째 살인이고, 시체가 발견되지 못하게 하려고 뭘 매달았다는 얘기들을 한다. 그들로서는 "노무현 때문에 죽는다"는 유서를 찾지 못한 게 안타까울게다. 난 죽음이 무조건 신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탄핵안이 통과되기 전날 난데없이 분신을 한 노사모 회원의 죽음은 내게 별 울림을 주지 못했다. 왜 죽었을까? 노무현의 탄핵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을까? 과거 민주화 열사들이 목숨을 바친 이유는 그것이 꽉 막힌 언로 속에서 자신의 저항을 보여줄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인데, 지금 세상이 어디 그런가? 그와 마찬가지로, 잘먹고 잘 살던 사람이 더 잘 살기 위해 뇌물을 쓰고, 그러다 들통이 나 모욕을 받은 나머지 홧김에 자살을 한 것을 동정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남사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을 '살인자'라고 부른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게다. 하지만 노무현이 살인자라면 그건 남사장이나 안상영 때문이 아니다. 배달호 씨의 경우를 보자. 노동운동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손배가압류 제도로 인해 빚더미에 오르고, 월급마저 차압당하는 신세였던 그에게 죽음 말고 다른 길은 없었다. 그의 죽음이 안타까움과 함께 우리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배달호 씨가 쓴 유서의 일부다. [...이제 이틀후면 급여 받는 날이다. 약 6개월 이상 급여 받은적 없지만 이틀후 역시 나에게 들어오는 돈 없을 것이다.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 아닌가?...]
회사는 다를지언정 박일수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활고 때문에 죽음을 택한 이들은 그밖에도 많으며, 그 책임은 상당부분 노정권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난 물었다. "야, 너는 왜 배달호씨가 죽었을 땐 살인자 소리 안했어?" 친구가 반문한다. "배달호가 누군데?"
노동자를 국민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자민련 대변인처럼, 기득권 세계의 사람들에게 배달호씨는 '인간'이 아니다. 그들이 애도하는 죽음이란 정몽헌과 안상영처럼 가진 게 많은 사람들 뿐. 못가진 자들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