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고 하면 '복사'를 생각했던 나,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카피' 하면 광고에 나오는 멋진 문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예컨대 이런 말.
"너는 바다를 꿈꾸고 나는 너를 꿈꾼다"
그러니까 나와 너, 바다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삼각관계를 형성한다는 뜻? 뭔가 있어 보이는 이 말은 실론티 광고란다. 삼각관계랑 실론티가 무슨 상관이냐고 묻지 말자. 광고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어필하면 되는 거니까.

"결혼 10주년, 남편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고백했다. 여자에게 보석은 피부라는 걸 알았다"
이건 화장품 광고란다. 남편이 아름답다고 했지, 피부가 좋다고 한 건 아니잖는가, 하는 촌스러운 질문도 그만두자. 말이 멋있으면 된 것이지, 논리를 들먹여 상황을 썰렁하게 만드는 건 무드없는 사람이다.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광고카피는 김정은의 '부자되세요!'다. 그리 멋있지도 않는 이 멘트가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은, 돈을 숭배하면서 겉으로는 부정하는 척했던 우리의 위선을 이 멘트가 깼기 때문이지 않을까? 참고로 나는 김정은이 선전하는 BC카드를 열나게 썼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냐고? 카드가 닳도록 쓰는 덕분에 월급을 타면 대부분이 카드회사로 가고 있다. 그러니 카드를 선전하면서 "부자 되세요---"는 명백히 틀린 말이지만, 역시나 광고카피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에 어필하는 것이고, 김정은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니 봐주자.

선거에도 이런저런 구호가 난무한다. '구호'라고 표현했지만, 선거에서 쓰는 말도 사실 광고카피와 다를 바가 없다. 내실에 못지않게, 누가 더 멋진 말을 만들어 내는가도 표심에 영향을 미치니까. 지금까지의 선거구호 중 가장 잘되었다고 평가받는 건 자유당 집권시절 민주당이 내세운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이 구호에 대해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와 “갈아보면 더 못산다”라는 진부한 구호로 맞섰지만, 민심의 향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급사하지만 않았다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정주영-김대중-김영삼이 붙은 92년 대통령 선거 때, 민자당 국회의원이 한 멘트도 길이 기억에 남을 명언이다. "산에는 산삼, 바다에는 해삼, 청와대엔 영삼"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 이 구호는 물론 김영삼의 당선에 쥐꼬리만큼도 기여하지 못했을 텐데, 참고로 난 이 구호를 참조해 이런 카피를 만들어 봤다.
"아빠는 샤워중, 아들은 공부중, 청와대엔 김대중"^^
정주영에 대해서도 하나 만들어 볼까? "인어공주는 아리영, 가요대상은 이수영, 청와대엔 정주영"^^

97년 정권교체가 된 이후, 각종 선거 때마다 한나라당이 내세운 구호는 늘 똑같았다. "부패정권 심판!" 그 구호가 먹혀서인지 2000년 총선부터 시작해 재보궐 선거, 지자체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압승을 했는데, 정작 중요한 게임인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한 걸 보면 약발이 다했나보다. 그러니 잘 먹힌다고 너무 우려먹을 일은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선거 구호로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탄핵반대, 민주수호"만 외치면 될 테니까. 지지율이 떨어져 고민중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과연 어떤 구호를 외칠지가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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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3-25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살겠다 갈아보자, 왠지 저한테도 친숙한데요? 마태우스님이 만드신 카피도 너무 귀여워요~ >.< 이번에 대장금 주제곡 '오나라'를 한나라당이 쓰기로 해서 또 발칵 뒤집혔던데, 정말 이젠 카피도 기대되는군요. ^^

진/우맘 2004-03-26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요즘 나오는 모 요구르트 CF 중에, 선거유세 장면을 패러디하여 '굵고, 길게 해보겠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변을 굵고 길게 해주겠다는 얘기겠죠?
저는 볼 때마다 궁금합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지고, 더불어 정치에 대한 넌더리도 만만찮게 심해진 요즘, 저 광고는 상품 판매에 마이너스 요인일까, 플러스 요인일까?

마태우스 2004-03-26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아빠는 샤워중 그거요? 하핫. 제 컨셉이 귀여움 아닙니까.
진우맘님/전 정치가 너무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는 게 안좋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좋은 광고에 정치 장면이 나오는 건 플러스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