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평균 열권 내외의 책을 읽는 나, 그렇다면 사흘에 한권 정도는 읽어야 평균에 다다른다. 1, 2월 각각 11권을 읽어서 "올해는 작년 기록을 넘어서보자!"며 의지에 충만해 있었는데, 그만 암초를 만났다. 철학에 관한 책인데, '그 책이 뭐가 어려워?'라고 할까봐 제목을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하여간 내게는 좀 버거운 책이다. 3월 9일 <과학콘서트>를 다 읽었으니, 8일이 넘도록 그 책만 붙잡고 있는 중이다.

'술만 먹고 다니니까 그렇지!'라고 할지 몰라도, 술은 이미 내 생활의 일부로 정착된 것이고, 작년에도 200회가 넘게 술을 마시는 동안 126권의 금자탑을 쌓았던 나다. 어차피 4시간에 달하는 출퇴근 시간에 책을 읽으니 그딴 게 별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왜 이렇게 진도가 안나가는지, 책만 펴면 졸려 어젠 갈 때, 올 때 모두 기차에서 자버렸다. 철학책이니 집에서 가부좌를 틀고앉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쉬운 책으로 실적을 쌓고난 뒤 여유있을 때 읽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된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책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란다. 내가 <그림으로 보는 현대철학>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자 내 사상적 스승인 어떤 분이 "이것도 읽어보라"고 권한 책인데, 엊그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니가 추천해 준 책 읽고있어!"라고 자랑을 했더니 그가 이런다. "재밌지? 어렵지도 않고..." 일반 사람에게 어려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내공, 그래서 난 탄식한다. '아, 나는 언제쯤 그런 내공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따금씩 그런 암초들을 만난다.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처럼 내공이 부족해서 어려웠던 책이 있는 반면, 그저 지겹기만 한 책들도 있다. 칼 세이건이 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도 책에 담긴 아름다운 말들에 비해 너무 지겨웠고, 노암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은 난해한 번역과 맞물려 나로 하여금 오랜 시간을 투자하게 만들었다. 600페이지쯤 되는 책을 만나면 이런 푸념을 하게된다. "두권으로 만들지.... 그럼 두권으로 카운트되는데..." 미술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큰맘먹고 산-무지하게 비싸더만-<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그 방대한 두께에 질려버려, 일년이 넘도록 책꽂이 한켠에서 먼지를 맞고 있는 중이다.

암초에서 탈출하고 나서 크게 기뻤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과, 당분간은 책을 읽지 않고 싶다는 생각 등등이 교차했던 기억이 나는데, 하여간 이번주까지는 눈앞에 놓인 암초를 제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떨어진 진도를 만회하기 위해 남은 기간 동안 가볍고 쉬운 책들을 맹렬히 읽을 계획인데, 열심히 해서 3월도 두자리 숫자의 책을 읽은 달로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 그런데 문제가 있다. 현 시국 상황이 나로 하여금 자꾸만 광화문에 가게 하니까. 거기 갔다가 술이라도 한잔 하면, 잘 때 책을 읽는 게 불가능하잖아? 그래서 이런 구호를 외쳐본다.  독서를 훼방놓는 한민자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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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03-1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브리치 할배 책, 재밌습니다. 그림도 좋구요. 할아버지가 손자 앉혀놓구 이거이 머시기 하면서 차분하고 다정하게 설명해주는 느낌이랄까요. 한번 그냥 쭉 읽어보세요. 제가 답답할때마다 아무데나 펴서 읽는 책입니다. 방대한 두께가 부담스러우시면 열화당 미술선서에서 보통 책 크기 두권짜리로 나온 게 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읽긴 이게 훨 좋네요.

"...그것은 분명히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다. 렘브란트는 그의 못생긴 얼굴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겅루 속에 비친 그 자신의 못브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우리가 이 자화상을 보고 금방 아름다움과 용모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성실성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진정한 얼굴이다. 거기에는 일부러 어떤 자세를 취했다든가 허식을 한 자취가 전혀 없다. 다만 자기의 생김새를 샅샅이 훑어보는, 끊임없이 인간 표정의 비밀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화가의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만이 있을 뿐이다."

p. 410, 20장 자연을 반영하는 거울 중


가을산 2004-03-17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암초가 뭔지좀 알켜조요~
그리고, 진짜루, 한민자는 각성하라! 저녁시간 다 뺏어먹게시리!
안그래도 아는사람 없으면 촛불 들고 기대서서 책이나 읽으려고 했는데,
대전은 고장이 작아서 1000여명 모이면 대충 알음알음 ngo관계자들은 낯이 익더라구요.
마치 모처럼 동창회를 하는 듯한 기분이에요.

갈대 2004-03-1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느림보 책읽기라 열심히 읽어도 일주일에 한 권이 고작이랍니다.. 올해에 60권을 읽을수 있을런지..(어느새 100권에서 목표 하향수정한 갈대 --;)

진/우맘 2004-03-1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 암초는 '언문세설'입니다. 카이레님은 재미있게 읽으셨다는데... 힝.

플라시보 2004-03-17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 정말 부럽죠. 한없이 어려운 책을 아주 재밌어 하며 쉽게 읽는 인간들... 제 동생이 바로 그런 부류입니다. 철학이건 경제건 뭐건 어쩜 그렇게 그 인간에게는 쉽고 재밌는 것들 뿐일까요? 움베르토 에코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를 빼 놓고는 거의 읽다가 포기를 했습니다. 소설이 일케 어려워 어쩌겠다는겨 하면서 신경질만 박박 부렸죠. 저도 요즘 책 읽는 진도가 당최 나가질 않아 걱정입니다. 빌린 책이라 곧 돌려줘야 하는데 며칠째 '코카콜라는 어떻게 산타에게 빨간옷을 입혔는가'를 읽고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4-03-17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한달에 11권이라고 해도 대단하지만, 일년으로 계산하니 백권이 넘어가는군요! 역시 독서는 꾸준하게 해야...목표달성 꼭 하시길 빌께요! ㅎㅎ 그리고 마태우스님의 정신적 스승님, 존경스럽네요~ ^^

마냐 2004-03-17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지난해 연말이던가, 제가 그해 50권 넘었다고 한 후배에게 자랑을 했더랍니다...후배 왈 "선배, 전 지난달에만 50권 읽었어요"라고라고...그 친구가 신문사 책 담당 기자였거든요...무진장 책 좋아하는 친구인데..암튼 좀 딱해보이기두 하더라구요...암튼, 대단하십니다.........글구, 전 어려운 책 절대 안보려구..신경써서 고릅니다...ㅋㅋ

마태우스 2004-03-17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리스트님/네, 그럴게요. 자기 전에 조금씩 읽으면..몇달이면 읽겠죠? 님의 인용을 보니 의외로 재미있나봐요?
가을산님/제가 다음 리뷰 쓰는 게 바로 그 책일 겁니다^^ 쉬운 책인데 어렵게 읽느냐고 핀잔 주지 마시길!
갈대/사실 권수가 중요한 건 아니죠. 뭘 얻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라고들 하더군요. 전 내공이 없기 때문에 권수에 집착하는 거지만요...



마태우스 2004-03-1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호호, 언문세설 아직도 읽고 계신가봐요? 빨리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플라시보님/동생분은 어떻게 그런 내공을 쌓으셨답니까? 하긴, 알아봤자 전 이미 늦었지만요. 코카콜라 그 책, 사진에서 들고있던 책이죠?

마태우스 2004-03-17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님의 격려에 힘입어 오늘 퇴근길에 30여페이지나 읽었습니다. 이제 50페이지만 더 읽으면....
마냐님/문학담당 기자분처럼 직업적으로 책을 읽으면 그다지 안좋을 것 같아요. 취미로 읽는 책이 더 재미있죠. 맘대로 고를 수도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