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고모가 다섯 있다. 그 중 세째고모의 아들-형님이라고 부르겠다-이 오늘 얘기의 주인공이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형님은 신문사 내에서 그래도 꽤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던 모양인데, 전라도 출신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을게다. 디제이가 대통령이 된 뒤, 언론계에서는 희귀한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형님은 청와대에 들어갔고, 5년간을 거기 있었다. 그 기간 중 우리집은 형님의 덕을 딱 한번 봤는데,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형님에게 부탁해 '부음'란에 이름을 실을 수 있었다.
한번 그렇게 되면 다시 내려오지 않는 우리 사회의 속성상,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형님은 총리 비서실장이 되었다. 그때 난 난초를 하나 보냈는데, 거기다 이렇게 썼다. "아니 이렇게 높이 되실 줄 알았으면 진작에 잘해드리는 건데 그랬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총리란 사실 얼굴마담에 불과한 존재니, 총리비서실이라고 해봤자 뭐 그리 대단할까 싶었다. 그런데...
3월 12일, 의회의 쿠테타로 인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고, 행정의 달인이라는 고건은 비록 대행이지만 꿈에도 그리던 대통령직에 올랐다. 신문을 보니 대통령 비서실이 고건을 수행하는지, 총리비서실에서 하는지 논란이 있다고 하던데, 어찌되었건 총리비서실이 예전보다 뜬 건 사실이다.
평소 인사청탁을 소리높여 배제하다가도 자기 친인척이 고위층이 되면 사람이 변하는 법, 지금 난 대행 기간에 무슨 청탁을 할 것인지 고민 중이다. 대충 생각을 해보면...
-내 밑으로 교수 하나를 더 뽑아달라고 한다.
-논문점수가 아슬아슬해 잘릴지도 모르겠는데, 이참에 정년 보장을 해달라고 한다.
-아예 정교수로 승진시켜 달라고 한다.
적다보니 전부다 내 직장에 관련된 얘기인 것 같다. 내가 그런 부탁을 할 리도 없겠지만, 사립학교에 총리비서실의 입김이 먹히기나 할까? 그러고보니 정관계보다는 우리학교 이사장이 친인척인 게 훨씬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가 못하니, 어쩌겠는가. 열심히 논문을 쓰는 수밖에. 이렇게 외치면서 말이다. "모든 청탁을 배격합시다!"
* 참고로 형님은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해, 명절 때 우리집에 오면 나와 같이 만화를 봤다. 나이가 들어서 만화가 시들해진 뒤에도, 형님은 다른 채널을 보는 나를 꼬셔 만화를 보게 했다. 그래서인지 형님은 비교적 동심을 간직하고 계셨는데, 정치판에 있으면서 동심이 많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