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남독녀 외딸로 자란 우리 어머니는 형제자매가 없던 것을 늘 한스러워하셨다. 다섯이나 되는 고모들의 등쌀에 시달릴 때면, 듬직하게 힘이 되줄 오빠나 신세한탄을 들어줄 동생이 없는 게 더더욱 안타깝단다. 형제를 자연이 준 친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2남2녀의 장남인 나는 축복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일게다. 하지만 난 형제에 대한 정을 느껴본 경험이 별로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려서도 그들은 나와 너무도 달랐으니까.

어릴 적, 난 내 여동생을 무척이나 이뻐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장난으로 여동생이 밉다고 하면 밥을 먹다가도 뛰쳐나가 울었다나. 그렇게 이뻐했던 여동생은 나중에 자라서 5년간의 쓰라림을 내게 선사했고, 지금도 내게 부끄러운 동생으로 남아있다.

지난 대선 때, 여동생은 노무현을 찍었다. 찍던 말던 별 관심도 없었지만, 하도 요란하게 무용담을 이야기하기에 알게 된 거다. 투표를 하려는데 의사인 매제가 "노무현을 찍으려면 투표를 하지 마라"고 집안에 가둬 놨는데, 잠시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 투표 마감 시간 직전에 한표를 행사할 수 있었단다. 그날 밤 노무현의 당선 소식을 들은 매제는 여동생과 밤새 부부싸움을 했고, "이제 내 인생은 끝이다"라고 절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매제는 병원에 잘 다니고 있으며, 내게 "그 월급으로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노무현이 당선된 후, 여동생은 입만 열면 노무현을 욕하기 바빴다. 사회주의자라질 않나, 품위가 없다질 않나, 그가 한국 경제를 말아먹고 있다질 않나. 난 도대체 그녀가 왜 노무현을 찍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얼마 전 탄핵이 가결되자 내게 전화를 하더니 이랬다. 여동생: 큰오빠야, 노무현 탄핵된 거 알아?
나: TV 봤어.
여동생: 너무 잘됐지 않냐? 우리집도 이제 잘살 수 있어.

어이가 없어 끊어버렸는데, 오늘 또 전화를 한다.
여동생: 큰오빠야, 난데, 왜이렇게 시끄러?
나: 여기 광화문이야.
여동생: 허참, 거길 왜갔어? 빨리 집에 가.
나: ...........
여동생: 탄핵 찬성 하는 애들은 없어?
나: 걔들은 게을러서 집에 있겠지.
여동생: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라, 무서워서 그런 거야. 과격한 노사모 애들이 돌로 쳐죽일까봐.

그쯤 했으면 그만둘 일이지, 아까 밤 11시쯤 또 집에다 전화를 해서 엄마를 바꾸란다. 요즘 어머님이 몸이 안좋아 일찍 주무시는 건 관심도 없는 듯했다. 참다못한 난 이렇게 말했다.
"너, 앞으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 너처럼 머리가 빈 동생이 있다는 게 난 쪽팔려 죽겠어!"
아닌게 아니라 난 진짜로 걔의 존재가 쪽팔린다. 누굴 찍은 게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의 일관성은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도대체 상식이라는 게 있긴 한걸까? 내가 밖에 나가서 형제자매 얘기를 안하는 게 다 그런 이유다.

세상은 그런 그에게 관대한 듯하다. 머리가 빈 동생이 좋다고 선뜻 결혼해 준 매제가 있고-그 대가로 매제는 엄청 힘든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씩 나에게 여동생의 만행에 관해 하소연하는 걸 들으면 정말 쥐구멍을 찾고싶다-직장까지 줬으니 말이다. 그녀는 어디 작가로 일하고 있는데, 최소한의 상식마저 없는 작가가 쓰는 글이 방송을 탄다는 게 나로선 코미디다. 한번은 정동영 인터뷰 원고를 써야 한다고 전화를 해서는 이렇게 묻는다.
"근데 정동영이 누구야?"
그게 내 동생이라니, 정말이지 돌아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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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3-1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정동영이 누구야?' 쫌 심하시네요. ^^
어느 집안이나 그런 사람이 하나둘쯤 있나봅니다.

그나저나... 사회적인 인식의 차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서로 이해하도록 노력은 해야겠는데...

sooninara 2004-03-15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저도 대선때 정몽준이 배신때린거 열받아서 남편하고 밤새 술먹고...노통찍었는데...요즘 들어서는 엄청 욕도 많이했답니다..(무료 7개월에 넘어가서 조손일보를 봐서 그런가^^) 그래도 일이 이렇게되자.사람맴이라는게...미워도 다시 한번 이럴까...
동생분은 마태우스님의 과장이 심하신건지..조금 엽기적이긴 합니다..
우리친정아버지..저 노통 찍었다고 미워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집의 50대이하는 전부 '노'를 찍었다는...

마냐 2004-03-15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지않은 노무현 지지자들이 동생분과 비슷한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싶기두 하구..암튼, 그저 적당한 수준의 관심만 언론에 두고 있다면 그런 변화는 오히려 당연한게 아닌가 싶기두 하구...(누워 침뱉는 기분이..)너무 탓하지 마시구..동생분과 대화를 늘리는게 왕도가 아닐까 싶기두 하구....^^;;;

마태우스 2004-03-15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정치적인 인식만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구요, 다른 면에서도 너무 차이가 커서 힘들 것 같습니다.
수니나라님/요즘 "xx했다는..."이란 말이 유행인가보죠? 음...매우 쿨해 보이고 좋은 것 같아서 저도 한번 써봅니다. "과장이 아니라 축소보도를 했다는..."^^
마냐님/제 동생은 노무현 지지자가 아니랍니다. 평소 이회창 노래만 부르다, 갑자기 선거에 임박해서 노무현을 찍겠다고 한 거지요. 제가 원하는 건 최소한의 일관성이지요.

비로그인 2004-03-1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동생 분....제가 보기에는 초지일관의 일관성... 있어 보이시는데요.
무법변칙의 일관성이요~~ 허...
언변달변의 오라버니에 작가 동생 분이시라니....그 또한 일관성 있어 뵈는데요
부럽습니다...

마립간 2004-03-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든 입가에 미소짓게 하는 이야기네요. (저는 달랑 여동생 하나있는데 미국으로 이사 간 후 8년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동생 생각나네.)

sooninara 2004-03-1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하다는 소리를 별로 못듣는데...들으니 좋군요...아줌마는 '핫'이 어울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