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쓰는 술일기는 그냥 일기가 아니라 술이라는 거대한 악에 홀로 맞서 싸우는 한 인간의 처절한 무용담이 아닌가 싶다. '연간 180일 이하'를 목표로 열심히 금주하자는 술일기의 취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제 겨우 61일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36번을 마셔버렸다. 12월에 신나게 퍼마실 걸 생각하면 미리부터 저축을 해야 하건만, 저축은커녕 빚을 내서 돈을 쓰는 격이다. 이런 추세라면 180일은커녕 250일이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오늘은 술약속을 취소하고 집에서 쉬기로 했다.

날짜: 3월 1일
술: 소주 한병+알파, 2차 가서는 맥주 다섯병?
상대: 생존퀴즈 모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좋았던 점: 모임이 영원하리라는 영감을 얻었다
나빴던 점: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10시쯤 정신을 잃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무리했나보다.

-오늘 출근하는 기차 안에서 설사가 나서 죽는 줄 알았다.
-태극기를 안달았다.

부제: 사랑 만들기

전에도 말했지만, 생존퀴즈라는 퀴즈프로가 있었다. 1회만 하고 끝이 났지만,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정기적인 모임을 한다. 한데 그 모임에 나오는 이들은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이 1라운드 탈락자다.

모임 멤버 중 오갑숙(가명)이라는 여자가 있다. 절세의 미인은 아니지만 정말 '참한' 여인네다. 성격이 좋으며, 잘 웃어주고, 말도 잘한다. 능력있는 회사원이며, 술도 제법 잘한다. 몸이 비쩍 마른 것, 그래서 굴곡이 없는 것은 단점에 속할 것 같다.

백선엽(가명)은 키가 크고 잘생겼다. 그리고 착하다. 그리고 박사과정 학생이다. 외모로 보면 에이 플러스를 주고픈 그에게 말이 너무 없는 것은 단점일 것이다. 모임 내내 입을 열지 않아, 그런 것을 못참는 나한테 늘 괴롭힘을 당한다. "여기에 대해 백선엽 씨의 견해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상황을 백선엽 씨가 정리해 보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그래도 그는 큰 눈을 껌뻑거리며 빙긋이 웃을 뿐이다. 퀴즈 대회에 나갔을 때도 침묵만 지키다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난 그 둘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임 참가자의 대부분이 둘이서 잘되는 것을 지지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답답하리만큼 진전이 없다. 여자는 분명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데, 남자의 속은 도통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모임 때마다 그 둘을 맺어 주려고 난리 부르스를 춘다. 한번은 귀가할 때 둘을 같이 보내기도 했다. "두분, 손잡고 같이 가요!" 물론 그 둘은 끝까지 손을 잡지 않았다. 남자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러는 게 싫으냐고. 아니란다. 그리고 모임만 있으면 꼬박꼬박 나온다. 그렇다면 남자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어제 모임 때도 우린 시종일관 둘이 잘되야 함을 역설했다. 자세한 건 살아봐야 알겠지만, 어울리는 한쌍이 잘되는 건 보는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억지로 되지 않는다. 주위에서 밀어주니 뭐니 해도, 될 커플은 되고 안될 커플은 안된다. 그런 걸 잘 알면서도 그 둘을 맺어주지 못해 안달하는 것은, 남자가 워낙 숫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겠다. 그러는 게 도움이 될지. 오늘, 백선엽이 오갑숙에게 전화를 걸었으면 좋겠다. 이번 주말에 둘이서 한번 만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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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3-02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갑숙이었다면. 그래서 백선엽을 좋아라 하는 맘이 있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남자가 좀 적극적인 것이 모양새가 더 이쁘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가 안하고 혹은 못하고 있음 나라도 확 하고 덤벼야죠.^^

진/우맘 2004-03-0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술일기의 취지가 금주였나요? 주량 늘리기, 혹은 모두 뻗게 하고 살아남기가 아니구요?
ㅋㅋㅋ 술이라는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이라... 그 거대한 악을 이 한몸 다바쳐 '마셔 없애겠다'는 숭고한 희생정신.^^

마태우스 2004-03-02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셨겠죠^^ 하지만 세상에는 님처럼 멋진 여성분이 그리 많지 않나 봅니다. 하기사, 그러니까 님의 존재가 더 돋보이는 거죠.
진우맘님/술일기의 취지를 모르셨다니, 서운합니다!!!!

비로그인 2004-03-0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일기의 취지는 금주였으나, 점점 변질되어 가는거 같은데요...ㅎㅎ 저 엄청난 가명의 두분, 앞으로 어떻게 진전되어가는지도 들려주세요~ 계속 제자리 걸음일거 같은 불안이...^^;;

paviana 2004-03-0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가명이 아니라 실명같아요..ㅋㅋ 꼭 거대한 악에 맞서 싸워서 승리하세요.정말 넘 웃고 가서 행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