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자주, 여동생 집에 가신다. 애를 봐주기 위해서다. 여동생은 애를 둘 낳았는데, 이제 두살인 둘째는 내가 아는 애들 중 가장 산만하다. 엊그제 우리집에 와서 잠깐 머무는 동안, 그는 컴퓨터를 고장내고, TV 리모콘을 없애놓고, 벤지밥을 먹었으며, 금붕어 먹이를 어항에 몽땅 쏟아붓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7개월만에 태어난 그 아이는 낳고나서 몸이 안좋아 헌혈을 해줘야 했는데, 그때 피를 준 사람이 나다. 그래서 그런지 그 녀석은 나를 많이 닮았고, 말 안듣는 것도 비슷하다. 정이 많이 갈만 하지만, 워낙 말썽을 피우는 통에 요즘은 그가 오는 것 자체가 두려울 정도다. 그런 애들을 우리 할머니더러 보게 하는 것이 난 영 마땅치 않다. 할머니가 1917년생이니 올해 벌써 88세, 그런 분에게 아이를 맡기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게다가 여동생이 할머니한테 잘한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뒤 2년간, 그 무거운 할아버지를 할머니 혼자 간병을 하셨는데, 여동생은 애 핑계를 대면서 단 한번도 문병을 가지 않았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자마자 잽싸게 전화를 해 애를 맡겼으니, 내가 얼마나 얄밉겠는가? 그래서 난 '할머니를 놓아주라!'며 시위도 하고, 때로는 단식투쟁도 했는데, 나만 허기졌을 뿐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생각해 보니, 여동생의 행위가 할머니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애봐주는 사람을 구해 애보기에서 해방되자 할머니는 매우 심심해하셨다. 그러자 심난해지는 것은 우리 어머니. 안그래도 바쁘신 분이 할머니와 놀아 드려야 하니 얼마나 초조하겠는가? 오늘 아침 어머니는 애들을 보러 누나집에, 혹은 여동생 집에 가자고 보채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엄마, 노인정에 한번 가보시겠어요? 거기 가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피, 노인정이 뭐가 재미있담? 내가 제대로 된 손자라면 어머니를 대신해서 할머니를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겠지만, 알다시피 난 나 혼자만의 쾌락을 즐기느라 어머니보다 더 바쁜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할머니는 오늘 또 여동생 집에 가시게 되었다.

요즘 한창 청춘을 불사르고 있는 내게도 노년은 찾아온다. 눈이 침침해 책도 못읽고 인터넷도 할 수 없다면, 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주는 친구들이 많이 있을까? 별로 자신이 없다. 그 전에 조용히 간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무료한 삶을 보내야 한다면, 난 도대체 뭘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두려워지지만, 그런다고 노년이 안오는 건 아니다. 무작정 노년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때 뭘 하고 살 것인지를 지금부터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거동이 불편해지더라도 제발 눈만 침침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눈만 잘 보인다면, 지금처럼 책이 내 좋은 친구가 되어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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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04-02-28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댓글을 넘 많이 다는 것 같아서(특히 마태우스 님 방에다) 좀 자제하려고 해도, 이 글을 읽으니 참아지지가 않는군요. 정말 좋은, 따뜻한, 암튼... 좋은 글입니다. 전 이런 글이 좋더라구요. 마음이 묻어나는 글...^^

비로그인 2004-02-2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생각'과 같은글 말입니끼??

책읽는나무 2004-02-28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리한 노동(?)이 아니라면.....손주들 커가는 모습 보시면서 사시는것도 괜찮으리라 봅니다....사실 노인들끼리 앉아서 어떤 희망을 얘기한다는것도 그렇고...손주들 새록새록 크는것은 무언가 희망을 품어봄직도하고..(망구 내생각인가??)....암튼...전 가끔 친정에서 일주일동안 묵었다가 오는데...그때 울시부모님...울민이 보고싶었다고...이놈이 없으니..집안이 적막하고 웃을낙이 없다고 매번 그러시더군요...그래서 노인들께 손주들은 애틋한 존재인듯하더군요...넘 동생분 구박하시지마세요...오히려 외할머님은 그것을 즐기시는지 모르시거든요...^^....대신 무리하게 애를 보시기엔 좀 연세가 많으시네요...^^....근데 그조카는 정말 대단하네요...^^

sooninara 2004-02-28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60대 젊은 할머니들은 손자 안보려고하시죠..본인이 놀기에 바쁘니까..하지만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에겐 증손자보는것도 재미가 있겠네요..
조카가 너무나 활동적이라 할머니가 힘드시긴 하겠습니다. 여동생이 육아우울증이 없나요?
저는 얌전한 아이만 키웠는데도 힘들던데..그렇게 일저지르면 못키울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