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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성 - 상 - 세계의문학 17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조홍식 옮김 / 을유문화사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 아직도 읽고 있어?"
아는 사람이 내게 한 말이다. 석달째 <제2의 성>을 들고 다녔으니 그런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그 책을 드디어 다 읽었다. 다 읽고 나면 무지하게 기쁠 것 같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내 머리에 남은 게 별로 없어서일 수도 있고, 고된 책읽기에 지쳐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난 상, 하 각 500여페이지에 이르는 페미니즘의 고전을 다 읽었고, 언젠가 토론이 벌어질 때 "너 제2의 성 읽었어? 그러니까 네가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말해줄 수 있다.
하여간 이 책은 강적이었다. 46페이지를 하루에 읽은 게 기록일 정도로 진도가 더디게 나갔다. 읽는 데 보름이 걸린 <장미의 이름>은 이 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장인 '결론'에 도달했을 때 이제야 끝나는구나 싶었지만, 무려 23쪽에 걸친 결론을 읽는 데만도 이틀이 걸렸다. 예과 강의 때 학생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제 석달 있으면 본과에 가죠? 본과 가서 공부를 잘하려면 예과 때 놀던 버릇을 버리고 인내심을 길러야 합니다. 본과 공부는 누가 더 오래 책상에 앉아 있는지의 싸움이니까요.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제2의 성>을 읽는 것입니다. 이 책을 다 읽는다면 여러분은 인내심을 최대한도로 기를 수 있습니다."
그럼 나도 인내심이 길러졌을까? 그런 것 같다. 얼마 전 입에 궤양이 생겼는데, 그전만큼 아프지 않고 넘어간 걸 보면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연구도 열심히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주옥같으면서도 난해한 말로 점철된 이 책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만, 내 식대로 대충 써보면 이렇다. 보부아르가 보는 세상은 남자가 지배하고, 여자는 노예상태에 있다. 여자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지만, 세상은 여자가 뭔가를 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언제까지나 사슬에 매어 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속임수를 열심히 고집하고 있다." 그러니 진정한 자유의 도래를 위해서는 남녀가 "우애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보부아르의 결론이다. 책이 나온 지 60년이 지난 지금, 보부아르가 2008년의 세상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조금은 나아졌다고 좋아할까? 아니면 '내가 바라던 게 이게 아니었다'고 탄식할까. 11월 13일자 AM7을 보니 이런 기사가 실렸다. 세계경제포럼 성격차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남녀평등은 130국 중 108위"란다. 그 옆의 기사를 보니 성균관 기획실장이란 자가 "조성민 친권 주장 일리 있다"라는 말을 했단다. 정말이지 우리나라야말로 보부아르의 재림이 필요한 듯하다. 보부아르, 환생할 거면 부디 우리나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