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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었다. 어디선가 이 책의 감상문을 읽었기에 대충의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책을 딱 펴는 순간 난 무지하게 놀랐다. 저자가 파블로 네루다가 아닌, 듣도 보도 못한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인 거다. 다시금 생각을 해보면 그게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네루다가 자기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는 게 말이 되냐?-난 여태까지 저자가 네루다인 줄만 알았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책들 중 이 책만큼 재미있고, 진도가 팍팍 나가는 책은 드물 거다. 게다가 페이지 수도 얼마 안되어 마음만 굳게 먹으면 하루에 다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참고로 <적과 흑>은 거의 열흘이 걸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독자를 시인으로 만들어준다는 거다. 장정일은 우리나라가 이상하게 시집이 잘 팔리는 나라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가 단편적인 이유는 시를 많이 읽어서라지만, 네루다의 친절한 조언이 곁들여진 <우편배달부>를 읽고나면 ‘나도 시를 한편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주위를 둘러싼 사물들이 달리 보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기차에서 이 책을 읽다가 책 뒤에 끄적거린 시가 있는데, 공개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네루다가 사는 섬의 주민들은 다 시인이다. 걔중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최소한 네루다같은 시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그리고 그를 흉내내어 시를 쓰려는 주인공 마리오를 높이 평가하기에, 그네들은 다 시인인 거다. 가장 훌륭한 시인은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마리오가 좋아하는 미녀 베아트리스의 어머니는 가진 게 없는 마리오를 아주 싫어하는데, 그녀가 딸에게 하는 말들은 그 자체가 시다. “강물은 자갈을 휩쓸어 오지만 말은 임신을 몰고 오는 법이야. 가방 싸!”란 구절도 범상치 않지만, 베아트리스에게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다”고 했던 마리오를 빗댄 어머니의 대꾸는 ‘죽인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네 미소가 한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범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 걸! 퍼질러 잠이나 자!”
책 전편을 통틀어 가장 인상깊게 읽은 시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 마리오가 좋아했던 ‘추신’을 덧붙인다. 내가 책 뒤에 쓴 시다.
제목: 아저씨
하루 두번씩 기차를 타는데
내 옆자리엔 늘 아저씨, 아줌마고
가끔씩은 군인아저씨라네
오늘은 웬일이냐 내 자리 옆에
젊은 미녀가 우아하게 앉는구나
냉큼 다가가서 앉으려는데
미녀는 날보더니 자기자리를 찾아 가버리누나
잠시 후 옆에 앉은 아주머니 한분-그러면 그렇지!-
총각, 어디까지 가요라고 물으신다.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저 총각 아니거든요
올 1월에 결혼한 유부남이랍니다.
* 옮기고 나니 네루다에게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