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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조주은의 여성, 노동,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 민연 / 2007년 4월
평점 :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페미니스트들을 굉장히 싫어하더라고요. 전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지 이해가 잘 안갔어요.”
난 숨을 죽였다. 그 다음에 과연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서.
“근데, 그 말이 맞더라고요. 무슨무슨 페미니즘 책을 나중에 읽었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어요.”
여성학 강의시간에 한 학생이 발표 시간에 한 말이다. 그가 언급한 책을 전에 읽었었는데, 난 그게 그렇게 엉터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렇긴 해도,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 일각의 거부감을 고려한다면, 페미니즘 관련 책자는 좀 더 설득력이 있고 신중하게 쓰여져야겠구나,는 생각을 했었다.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은 정말 유익한 책이었다. 내가 유익하다고 말하는 건 모르던 사실을 알게 해줬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평소 잘 몰랐던 사실들을 깨닫게 됐는데, 어머니들이 동원된 학교급식의 문제점이 그 하나인데, 학교급식은 국가와 학교가 해야 할 일을 여성인 어머니에게 전가하는 행위라는 걸 이 책이 아니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깨달음은 여성에 대한 진보진영의 무심함이었는데, 다음 문장들에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내 주변의 이른바 386 운동권과 결혼한 여성들의 삶은 너무 바쁘다. 가족 생계 책임지랴, 자녀 양육하랴...(189쪽)”
“386 남성들은 왜 유난히 피임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식할까?...남성 활동가들이 사회 운동하느라고 분주하고, 밤늦은 술자리를 가질 때, 그와 성관계를 맺은 여성 활동가들은 다음 생리 때까지 적어도 한달 동안 피가 마르는 초조한 나날을 보낸다(195쪽)”
“한 단체의 대표와 사귀던 어느 여성 활동가는 결혼 전에 세 번의 낙태를 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계급, 평화, 통일처럼 진보진영이 몰두하는 주제들에 대한 논의만큼 비중있게 성 담론(콘돔 사용법만이라도)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필요하다)(197쪽)”
옥의 티를 끄집어내자면, 읽다가 이런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제왕처럼 군림하면서 밥을 처먹기만 하는 남성이 있는 가정에서 여성들의 휴식은 불가능하다(59쪽).”
가정이 휴식의 공간이란 건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얘기, 하지만 이 당연하고도 좋은 말이 ‘처’란 글자가 붙음으로 인해 독자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페미니스트가 ‘낙인’이라면, 많은 남성들이 그 단어에서 과격함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면, 단어 선택 하나에도 좀 신중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의 대의에 동감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말이다.
* 참고로 난 아는 분한테서 이 책을 받았는데, 고맙게도 저자가 직접 내게 사인과 더불어 따뜻한 말씀을 해주셨다. 저자 분은 물론이고 그 아는 분한테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