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친과 4시반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일이 잘못되어 2시 반에 극장에 도착해 버렸다. 두시간 동안 뭘한담? 어디 구석에 숨어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좀 궁상맞아 보일 것같아 혼자 다른 영화를 봐야겠다는 깜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못본 <말죽거리>를 보면 어떨까 했는데 시간이 안맞는다. 2시 반에 상영하는 건 딱 한편이 있었고, 그게 바로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비는 시간이 없었으면 절대로 보지 않을 영화였지만, 보고나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영화가 막 시작하려고 해 소변도 못보고 달려가서 앉았는데, 그로부터 두시간 동안 가장 잘 참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한 채 버티고 앉아있었던 것만 봐도 재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 영화를 <낭만자객>과 비슷하려니 하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일 것이다.

 

1) 김정화: 언젠가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김정화를 처음 봤다. "참 시원하게 생겼네?" 이게 내 첫 느낌이었다. 그 시원함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라 영화에 나오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니모를 찾아서>를 보는 느낌까지 들었는데, 김정화만 봐도 그다지 돈이 아깝지 않다는 게 내 주장이다. 난 작고 아담한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라 김정화가 내 타입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꼭 이런 질문이 따른다. "니 타입이면 어쩔 건데?" 내가 뭐 어떻게 하겠다고 했나? 그냥...그렇다는 거지.

 

 

2) 벨소리: 영화에 나오는 벨소리는 웃기는 게 많다. <싱글즈>에서 장진영의 휴대폰은 "대-한민국"이었는데, <간첩>의 남자주인공 공유의 벨소리는 다음과 같다.

"안받아? 이거 흥미진진한데. 받을 때까지 울려보자고. 전화를 안받는 건 상대방을 두번 죽이는 거라구"

 

3) 줄거리: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차이는 말이 되는가 안되는가의 차이일 것이다. <천국의 계단>이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는 건, 말이 안되는 대목이 너무 많아서다. 예컨대 네티즌들이 지적한대로 앞의 사물도 잘 못보는 최지우가 별장 밖에 서있는 권상우를 보고 장 속에 숨는 건 말이 좀 안되잖아? 물론 <간첩>의 장면들은 굉장히 유치한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괜찮게 느껴진 건, 전체적으로 봐서 말이 그럭저럭 되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화의 키스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내게는 신선했다.

 

4) 백일섭: 연기를 잘하는 백일섭은 영화를 푸근하게 만들었다. 그의 부인으로 나오는 김애경도 마찬가지인데, 옛날에 난 김애경이 나오는 에로영화를 동시상영 극장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녀를 보면 아직도 거부감 비슷한 감정이.... 내가 원래 좀...이상하다. "뽑기는 완성된 모양을 생각하면 손끝에 힘이 들어가 깨지기 마련"이라는 백일섭의 "뽑기론"은 참 인상적이었다.

 

5) 유머: 좋은 유머와 나쁜 유머의 차이는, 나쁜 유머가 뜬금없고 영화랑 매치가 잘 안되는데 반해, 좋은 유머는 영화 속에 녹아들어가 그 자체는 웃긴 말이 아니라도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영화에 나온 나쁜 유머의 예다.

공유: (비디오방에서) 아니 저게 뭐야? 아줌마, 시네마천국 틀어달랬잖아요?

아줌마: 신애마천국 맞잖아!

그럼 좋은 유머는? 글쎄, 좋은 건 아니고, 그냥 어중간한 유머의 예다.

김정화: ......통일의 길을 닦아야죠....

김애경: 통일의 길은 불도저가 닦고 있으니 넌 들어가서 마루나 닦아 이년아.

 

유치한 장면이 꽤 나옴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괜찮았다고 생각을 하지만, 남들은 어떨까? 맥스무비의 별점순위를 보니 6.64로, 내사랑 싸가지의 5.38보다는 높다. (참고로 <낭만자객>은 5.03 정도 되었다) 6.6 정도면 뭐 적당한 평가라고 생각을 하는데, <태극기 휘날리며>가 9.08로 1위다! 이럴 수가. 그 영화가 재미있나보다. 100억원을 들인 영화라 망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재미있다니 다행이다. 나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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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05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유치할꺼 같애~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괜찮은가보죠?? 마태우스님 영화감상문을 보고 있으면, 대사들을 어찌저리 기억하고 계시는지 신기하다는...^^

진/우맘 2004-02-05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배우 이름은 잘 기억 못 하면서 대사는 잘 외우시는군요. 한 번 본 연극은 다 외워버리는 <유리가면>의 마야도 아닐터인데...

마태우스 2004-02-0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거요. 사실은 제가 영화 중간중간에 맘에 드는 대사가 있으면 노트에다 적거든요.... 저 머리 나뻐요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