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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 노지양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평점 :
성폭행은 참 특이한 범죄다.
첫째, 피해자를 먼저 의심한다.
절도나 강도를 당한 이는 위로의 대상이지만,
성폭행 피해자는 자신의 말을 거짓이라 여기는 세상의 시각과 싸워야 한다.
평소 행실을 의심받는 것은 물론이고
돈을 뜯으려는 꽃뱀으로 몰리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둘째, 피해자의 말이 진실로 밝혀지면 그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다.
강도를 당한 이에게 “왜 조심하지 않았냐”고 따져묻는 이는 없지만,
성폭행 피해자에겐 “왜 그 시각에 거기 있었냐?”고 묻는다.
더 이상한 점은 다음이다.
남성들은 성폭행을 저지르는 이가 극히 일부이며,
그런 일이 있다고 해서 남성 전체를 범죄자로 봐선 안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강지환이 같이 일하는 작가 두 명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술에 취하게 한 뒤 성폭행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다.
“남자가 있는 집에 따라가는 것 자체가 문제다.”
아니, 강지환쯤 되는 지명도 있는 인물이 잠재적 성폭행범이라면,
이 세상 남자를 다 예비성폭행범으로 일반화해도 되는 것 아닌가?
다락방님이 추천해준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는
거짓으로 성폭행 신고를 했다며 뭇 남성들의 분노를 자아낸 ‘마리’라는 여성이
무고로 몰렸다가 가까스로 혐의를 벗는 이야기다.
위탁가정에서 자랐고, 근사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마리는 ‘관심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을 받아야 했고,
경찰은 강압적인 태도로 마리를 위축시켰는데,
이는 마리가 ‘그래요, 다 거짓말이에요’라는 자백을 하게 만들었다.
당장의 상황이 힘들어서 한 거짓자백 이후 마리의 삶은 지옥이 됐다.
주위 사람들은 다 등을 돌렸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꿈꾸던 대학진학도 포기했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술을 마셨고, 살이 쪘다...
그녀의 돈을 훔쳐가는 한심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남성들은 ‘무고죄’에 예민한지라
마리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하지만 마리는 운이 좋았다.
그녀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건 마리가 진실을 위해 투쟁한 결과가 아니라,
그 성폭행범이 연쇄범이었고, 그가 보관한 사진에 마리를 성폭행하는 장면이 있어서였다.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성폭행에서 무고가 70-80%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무고로 확정된 이들 중
마리처럼 강압적인 상황에 몰려 억울하게 당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지 따져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마리에게 또 하나 다행인 것은
미국 경찰들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는 점,
이 사과는 마리의 인생을 훨씬 더 낫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다.
실화를 재구성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웬만한 추리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고,
성폭행이란 범죄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좋은 책이다.
딱 하나 지적하자.
책이 시작되는 13쪽의 부제목에 ‘2010년 8월 18일’로 돼있는데
이건 2008년으로 고쳐야 한다.
책 읽는 동안 이것 때문에 시간 순서가 안 맞아 머리가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