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물리학 -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에서 양자과학 시대 위상물질까지
한정훈 지음 / 김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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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입자 물리학이나 우주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고체 물리학자'의 물리학 책이 반갑다. 새로운 시각, 새로운 내용은 언제나 필요하니까.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고체 물리학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흥미유발 요소가 조금 떨어지리라는 점은 어쩔 수 없다. '양자 홀 물질'이니 '그래핀'이니 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우주'나 자연의 '기본' 입자 등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진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흥미로운 비유를 들어 물질의 성질과 그의 연구 분야를 설명하려고 한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책의 내용은 고등과학원에서 운영하는 과학 웹진 <호라이즌>에 저자가 연재했던 것을 상당수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일반인을 위한 글이어서 저자의 인생과 경험담도 상당히 녹아있다. 일정 부분 <김상욱의 과학공부>가 떠오른다. 글의 성격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이야깃거리는 물질이다. 물리학을 소재로 한 절대 다수의 대중 과학 서적은 우주와 입자를 다룬다. 그 중간 세계에는 인간이 있고, 일상이 있고, 일상을 점철하는 물질이란 것이 있는데, 그 물질을 대중에게 친근한 언어로 설명하는 책은 한글로도, 영어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물질 이론을 수십 년간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참 아쉬웠다. 우리 분야의 대변서, 아니 항변서라도 한 권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더 이상 대학교에서 승진의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될 나이, 30여 년의 연구 경험, 그리고 지난 수년간의 대중 강연과 글쓰기 경험, 이런저런 요소를 모아봤을 때 내가 책 한 권쯤 써도 좋을 시점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은, 그것이 소설이든 수필이든 과학 서적이든 인문 서적이든, 모두 자기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교에서 물리학 공부를 시작한 이후로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는데, 딱히 한두 마디로 대답할 방도가 없었다. 이제 누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두 손 모아 이 책을 한 권씩 드릴 작정이다. 이게 제 인생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책처럼 이 책은 필자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이 책을 쓰면서, 출판된 지 몇 년 안 된 내 전공 서적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알지 못할 수식이 가득 차 있어 읽기 버거웠다. 내가 쓴 책인데, 몇 해가 지나니 이젠 나에게조차 생소했다. 그래, 이래서 책을 써야 하는구나 싶었다. 기억은 생물학적 쇠퇴와 함께 스러져가지만, 기억이 정점에 달했을 때 정리를 해두니, 기억은 사라져도 기록은 남는구나 싶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 아닐까? 책은 기억의 기록이다. 동시에, 저자를 기억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통로이다. 이 책을 마무리했으니 이제 나의 생물학적 기억 공간에 새로운 걸 좀 채워볼 수 있을 것도 같다. (12~13 페이지)

이 책의 의의와 저자의 마음가짐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옮겨왔다. 고체 물리학은 사실 우리 주변에 있는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며, 그만큼 응용성이 크다. 물론 이 책은 우리 주변의 흔한 물질보다는 저자가 연구하는 '양자 물질'들의 세계를 다룬다. 우리 주변의 물질은 이미 이해를 잘 하고 있어서 연구할 거리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뒤 부분으로 가며 양자 물질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앞 부분에서는 물질 및 원자의 일반적 성질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원자를 소용돌이vortex로 이해하려고 했던 켈빈 경의 모델이나 핵자를 위상수학적 매듭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스컴Skyrme의 모델 등 과학사에서 잊힌 이론이 결국 고체 물리학에서 부활하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고 매우 흥미로웠다. 고체 물리학의 세계를 슬쩍 엿보기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블로흐는 지도교수가 제시한 두 번째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기로 했다. 금속 속에서 전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숨이 턱 막힌다. 원자가 빽빽이 쌓여서 만들어진 게 물질이다 보니, 그 속에 사는 전자는 그저 텅 빈 공간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다. 물질 속의 실제 모습은 나무가 발 디딜 틈 없이 빽빽이 자라는 울창한 밀림에 가깝다. 전자가 과연 이런 밀림을 요리조리 잘 헤쳐가면서 물질 전체에 그 존재를 확산할 수 있을까? 만약 전자가 구슬처럼 단단한 공에 가까운 입자라면 이런 문제는 정말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전자가 애초부터 파동 형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중력 법칙의 지배를 받는 사과가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만큼이나, 전자가 물질 전체에 퍼져 있는 꼴로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다. 굳이 물질이라는 밀림 속에서, 원자라는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다니는 유리구슬 같은 전자일 필요가 없다. 그건 전자가 구슬 같은 알갱이라는 우리의 고정 관념에서 비롯된 착각일 뿐이다. 블로흐는 약간의 수학 지식만 있으면 금방 증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자는 고체 속에서 애초부터 파동 형태로 편재하고 있으며, 각각의 전자 상태는 조금 전 소개한 (A, B, C)라는 3개의 마디 수로 표시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버렸다. 그가 하이젠베르크와 대면한 지 불과 1년 만인 1928년의 일이다. 이제는 (A, B, C)라는 명패가 붙은 각 방에 파울리 원리에 따라 남과 여, 두 가지 성의 전자를 차곡차곡 쌓기만 하면 고체 속의 전자 구조를 깔끔하게 이해할 수 있다. (101~102 페이지)

  입자의 대표 속성 중 하나를 꼽으라면 하나, 둘, 이렇게 셀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예견과 그 뒤에 일어난 실험적 검증에 따르면 빛도 하나, 둘 셀 수 있다. 빛도 입자다. 따라서 빛도 물질이다! (162 페이지)

  탁월한 물리학자는 어떻게 남들보다 한발 앞서는가? 내가 듣고 보고 대화해본 최고의 물리학자들은 그렇게까지 정보 취득에 민감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들은 아마존에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마존을 창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안목이 있다. 자신의 안목을 믿고,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을 힘들게 덤불을 헤치면서 개척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자신이 개척한 숲속의 오솔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차츰 많아지기를. (29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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