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통권 168호 - 2019년 9월~10월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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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밀린 숙제를 하고 있다. 녹색평론을 좀 읽었다. 특히 발행인 김종철 선생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글을 관심 있게 보았다[1]. 요즘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생태문명’이라는 단어가 더욱 눈에 확 들어온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김종철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근대’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그 지속불가능성입니다. 왜냐하면 근대란 자신의 생존기반을 끊임없이 부수고 짓밟지 않으면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근대문명을 뒷받침해온 것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이었습니다. 수십만 년에 걸친 호모사피엔스의 생존 기간 중 불과 200~30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근대문명’은 주로 지하에 매장된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을 거의 고갈시켜버렸고, 그 자원 중 화석자원들이 근대문명의 유지와 확산을 위한 불가결한 에너지원으로 무절제하게 남용됨으로써 기후변화라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대두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싫든 좋든 이 근대문명을 종식시키고, 어쨌든 생태문명을 시급히 재창조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재창조’라는 말을 쓴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즉, 생태문명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우리가 창안할 필요도 없는, 오랜 세월 인류가 살아온 기본적 생활양식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인간 역사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비근대적’ 삶을 누려왔습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 비근대적 삶이란 기본적으로 재생 가능한 자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따라서 큰 이변이 없는 한, 그것은 이 지상에서의 인간의 영속적인 삶을 보장하는 생활양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생태문명의 재창조란 ‘근대’가 이 세계를 전면적으로 지배하기 이전의 거의 모든 토착적 혹은 전통적인 삶의 복구를 통해서 또하나의 ‘비근대적 문명’을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복구는 단순한 복원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근대’를 통과해오는 동안 불가피하게 손상된 자연적 및 사회적 질서를 수선∙치유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인류 사회에 축적되어온 갖가지 창조적인 지혜와 경험과 기술을 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가 ‘재창조’라는 용어를 강조하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9~10 페이지)


근대문명에 대한 평이 좀 거칠기는 하지만, 이제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분명한 당위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생태문명의 재창조란 ‘근대’가 이 세계를 전면적으로 지배하기 이전의 거의 모든 토착적 혹은 전통적인 삶의 복구를 통해서 또하나의 ‘비근대적 문명’을 창출한다는 것”이라는 전망에 나는 실망한다. 이것이 현실성 있는 대안일까. 우리의 물질과 편안함에 대한 욕망을 제어해서 우리의 존재를 이 지구에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 만 년 또는 천 년 전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생태문명인가. 과연 우리가 ‘택배’로 대변되는 삶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삼성전자의 반도체 라인’이라는 근대문명의 총아를 해체하고 “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문명”(10 페이지)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비근대’인가 ‘탈근대’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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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글에만 대한 감상이다. 매우 유익해 보이는 (일본 극우파와 후쿠시마 사고 등에 대한) 그 외의 글들이 있는데, 혹시 기회가 되면 추후에 감상을 적으려고 한다.

[1] 시 전문 계간지 <신생> 창간 20주년을 기념하여 행한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2] 저자는 ‘전근대’란 단어가 근대는 발전이라는 가치평가를 내재하므로 ‘비근대’라는 용어를 쓴다고 밝힌다(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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